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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권하는 사회, <약탈적금융사회>

약탈적 금융사회

제윤경·이헌욱 지음/부키/264쪽/1만3800원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면 온갖 욕을 먹게 마련이다. 빌릴 때부터 갚을 생각이 없었던 파렴치한은 논외로 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을 갚아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 빌린 돈을 갚고, 그렇게 해서 생긴 2차 빚을 갚기 위해 3차 빚을 지곤 한다. 이렇게 빚이 거듭되면 이자는 불어나고, 결국 그는 헤어날 수 없는 빚의 늪에 빠져버린다. 어느 순간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단어는 ‘포기’다. 이제 채무자는 채권자에 대한 죄의식과 삶을 망쳐버렸다는 절망감에 물들어 버린다.


그런데 잠깐 시선을 달리 해보자. 돈을 갚지 못하는 건 오직 돈 빌린 사람의 책임일까. 돈 갚을 능력이 안되는걸 알면서도 돈을 빌려준 이에겐 책임이 없는가. 월급이 100만원인 이에게 200만원을 선뜻 빌려주는 데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는 걸까. 혹시 돈을 빌리기 위해 맡긴 담보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약탈’이라 불러도 좋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와 이헌욱 변호사는 “지금의 과도한 빚을 개인의 무책임함으로만 결론지을 수는 없다”며 “이제 ‘약탈자들’에게 책임을 묻자”고 제안한다. 


신용카드나 주택담보대출이 흔하지 않고 집값도 안정적이던 시절, 사람들은 매달 들어오는 월급에 맞춰 가계를 꾸리고 미래를 계획했다. 써야할 돈과 남겨둬야할 돈을 구분했고, 그래서 빚을 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 저축률도 높았다. 1987년 저축률은 24.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에 올라서 2000년까지 부동의 1위였다. 초등학교에서 저축을 권장하는 표어와 포스터 짓기를 하는 시절이었다. 



쓴 셈 치고 저축하자!


지금은 아무도 저축을 권하지 않는다. 대신 빚을 지라고 유혹한다. 그 결과 한국의 전체 가구 중 60% 이상이 빚을 안고 살아가고, 이들 중 74%는 원리금 상환에 부담을 느낀다. 1998년 한국의 가계 부채 총액은 190조 수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율은 55.8%였다. 반면 2011년 가계 부채는 1103조로 GDP 대비 90%에 달한다. 지금 1000조원대의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시한폭탄이다. 상위 계층은 집에 딸린 빚에, 저소득층은 고금리 대출에 허덕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2008년 저자에게 한 중년 부부가 상담을 받으러 찾아왔다. 월소득 400여만원인 그들은 풍요롭진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이었다. 그들은 2006년쯤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집값이 미친 듯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척,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선 모두들 집과 돈 이야기만 했다. 저축으로 돈을 모아 집을 사겠다는 생각은 ‘상식’이 아니라 ‘어리석은 고집’이라고 했다. 전세에 살던 이 중년 부부도 세상의 흐름을 타기로 했다. 2억원을 대출해 집을 샀다. 그 뒤로 집값은 1억 이상 올랐다. 아껴서 저축했던 과거의 자신이 한심하게 보였다. 


그리고 2008년,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가 닥쳤다. 집값은 오르지 않았고 거래는 끊겼다. 매월 이자로만 100만원이 빠져나가고, 곧 원금 상황이 닥친다. 지금 40대인 남자는 앞으로 20년간 매월 150만원 이상을 은행에 내야한다. 그렇게 은행에 내는 이자가 2억이 넘는다. 빌린 돈의 2배를 갚아야 집은 비로소 내 집이 되는 것이다.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말한다.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 자산 투자로 돈 버는 사람이 부러움의 시선을 받고, 일해서 돈 모으는 사람은 바보 취급 받는 세상이다. 결국 ‘나만 가난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평범한 중산층까지 온갖 위험한 재테크로 내몰았다. 평생 직장이 사라지고 사회안전망과 복지 제도가 미비한 사회, 재테크는 중산층이 뛰어들 수밖에 없는 도박판이었다. 


중년만 빚을 지는 건 아니다. 아기는 200만원짜리 고가 유모차를 탄다. 물론 12개월 할부다. 할부가 결국 ‘빚’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부모가 “돈 없다”고 하면 아이는 “카드 있잖아”라고 답한다. 요즘 아이들은 “버는 범위 내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카드만 있으면 소비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성장한다.



요즘 흔히들 타는 유모차. 200만원 아님. 조금 내렸음.


‘약탈적 금융사회’를 만든 몇 명의 범인들이 있다. 먼저 금융기관. 외환위기 이후 기업대출에서 가계대출로 사업 방향으로 수정한 금융기관들은 “맑은 날 우산 빌려주고 비오는 날 거둬가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초인종을 누르면 돈이 튀어나오는 광고를 내보내고, ‘우량 고객을 위한 특별 대출 상품’을 소개한다면서 저리로 돈을 빌리라고 유혹한다. 고객에게 돈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여부는 큰 고려 대상이 아니다. 돈을 못받아내면 담보로 맡겨둔 자산을 처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이러한 ‘약탈적 대출’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지만, 집값이 계속 올랐기 때문에 그 파괴력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소비자가 파산을 하든 말든,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든 말든, 금융기관은 무책임하다. 유능한 관료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게 맡겨진 서류에 충실히 사인함으로써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안내했는데,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무사유성’의 무서움을 지적한다. 금융기관의 너그러운 대출은 이러한 무사유성의 한 사례다. 


언론은 약탈적 금융 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수 역할을 했다. ‘가을 빚에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빚을 좋지 않게 여겨왔으나, 요즘의 언론은 빚에도 ‘좋은 빚’이 있다면서 대출을 부추겼다. 월급쟁이라도 빚을 내 투자하면 금세 강남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기사를 내보냈다. 남들 다 빚내서 투자하는데 여기 동참하지 않으면 손해가 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독자의 ‘손실 회피 심리’를 자극했다. 


정부도 면책되지 않는다. 전세가가 폭등하면 전세 자금 대출을 확대하고, 대학 등록금이 치솟으면 학자금 대출을 확대한다. 실업률이 오르면 햇살론같은 무담보 대출을 마련하고, 내 집 마련이 어려우면 ‘생애 첫 내 집 마련 대출’ 상품을 내놓는다. 장기적으로 복지 제도를 보완할 생각을 하지는 않고, ‘돈을 빌려 주면 될 것 아니냐’는 식으로 대응한다. “정부가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탐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조차 시장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면서 서민의 살림살이에 빚을 보태고 있다.”


무심코 긁은 신용카드는 어떤가. 외환 위기 이후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발급과 마케팅 기준을 완화했다. 그 결과 1999년부터 3년만에 경제활동 인구 당 카드 수는 2.5배, 사용액은 6배 증가했다. 거리에는 아름다운 여성 도우미들이 좌판을 벌인 채 카드 가입을 권했고, 어디서 돈이 생기는지 모르는 대학생들까지 몇 장의 카드를 돌려막기로 긁어댔다. 어느 택시기사는 저자에게 4000원의 택시비를 결제하기 위해 9장의 카드를 꺼냈지만 모두 한도가 초과됐다는 메시지를 받은 어느 여성 고객의 사연을 전한다. 몇 푼의 포인트 적립과 할인 혜택으로 고객을 유혹하는 카드 회사는 정작 그러한 혜택이 카드 발급 후 1년이면 사라지기 일쑤라는 사실은 좀처럼 알리지 않는다. “속았다”는 걸 안 몇몇 고객이 카드를 해지하려 들면, 그 사이 새로 나온 카드 발급을 권한다. 


물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파산, 회생, 워크아웃 등 채무자들의 고통을 경감할 몇 가지 제도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이들 제도는 이용이 까다로운데다가 채무자의 생활 보장·재활보다는 채권자의 채권 회수에 역점을 두고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저자들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채무 조정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채권자에게 전화를 걸거나 찾아오고 가정과 직장에서도 망신을 당하게 만드는 채권 회수 시스템은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할 뿐이다. 미국은 개인 파산과 면책 제도가 발달해 있다. 채무자가 이를 이용하면 채권자는 부채를 돌려받지 못하기 떄문에, 채권자는 채무 조정 단계에서 더욱 많은 유연성과 합리성을 발휘한다. 


채무자들끼리는 뭉쳐야 한다.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여럿은 바꿀 수 있다. 최근 한국의 사회적 기업과 시민 단체에서는 ‘빚을 갚고 싶은 사람들’(빚갚사)이라는 이름의 채무자 단체 결성을 준비하고 있다. 채무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면서 새 출발의 의지를 다지고, 약탈적 대출의 문제점도 지적한다는 취지의 단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채무자 스스로 죄의식을 떨쳐버리는 일이다. 누가 나에게 빚을 권했는지, 나같은 처지에 빠진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이 모든 것에 사회의 책임은 없는지 살펴본다면 쓸데없는 부끄러움 없이 다시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다. 고대에 노예로 태어난 이는 그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 예속돼 있었다. 그러나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스파르타쿠스는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귀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빚은 운명도 개인의 잘못만도 아니다. 비합리적인 충동과 욕망에 이끌리는 건 인간 누구나 보일 수 있는 약점이다. 약탈적 금융 기관들이 채무자에게 심어둔 ‘내 탓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저들의 ‘도덕적 해이’도 함께 물어야할 때라고 저자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