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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영화는 묻는다

김곡+김선=방독피

김선은 확신이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오만하다거나 경박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방독피>는 중간까지는 미심쩍다. 솔직히 미리 잡아둔 인터뷰를 어떻게 능수능란하게 취소시킬 수 있을까 궁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반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힘이 가득하다. 종반부에는 서울 거리에 엄청난 묵시록적 풍경이 나온다. 김선이 인용한 오시마 나기사의 말은 매우 멋지다.



전위라고 다 전위가 아니다. 미학의 전위에서 정치적 보수성을 드러내거나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고루한 형식에 담아내는 예술가가 부지기수다. 

1978년생 일란성 쌍둥이 형제 김곡·김선은 현재 한국 영화의 최전위에 선 감독들이다. 미학과 정치 양 측면에서 모두 최전위라는 점에서 이들은 한국 독립영화계에서도 독특한 존재다. <반변증법>(2001), <자본당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2003) 등을 내놓으며 주목받았고, 김곡은 <고갈>(2008)을 따로 공개하기도 했다. 

<방독피(Anti Gas Skin)>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상영됐으며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관객과 만났다. 
줄거리는 이렇다. 서울시장을 뽑는 투표일, 파란색을 상징으로 쓰는 여당 국회의원 주상근은 아내와 함께 투표소로 향한다. 마침 서울에는 방독면을 쓴 연쇄살인마가 출몰하고 있다. 주상근은 “뽑히면 죽는다”는 협박편지를 받고 불안해한다. 얼굴에 털이 난 늑대소녀는 경찰 간부인 아버지에게 강간당했다고 믿는다. 
늑대소녀는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하길 원하는 이들을 몰고 다닌다. 주차질서요원 보식은 셔츠 안에 남몰래 슈퍼맨 의상을 입은 뒤 살인범 잡는 날을 꿈꾼다. 한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백인 미군병사 패트릭은 여자친구가 살해당하자 살인범의 자취를 쫓는다. 




정치 비판, 무의식을 파고드는 성폭력, 성장 위주의 한국 기독교, 소시민의 과대망상,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오리엔탈리즘 등 온갖 소재가 한 영화에 녹아 있다. 혼란스럽게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일찍이 한국 영화가 목격한 적이 없는 묵시록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김선은 관객과의 대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광우병 쇠고기 파동 직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들썩들썩하던 한국의 정치사회, 시민사회에 대해 역사적으로 일갈하고 기록을 남기려고 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영감을 얻는 곳은) 세상, 세상밖에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야말로 엄청난 아이디어를 줬어요. 전의를 불태우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할까요. 대단한 세상이에요. 쓰는 데 1주일밖에 안걸렸어요.”

종반부의 편집은 긴박하고 강박적이다. 한 관객은 “너무 강박적이라 지루했다”고 말했다. 이에 김선은 “극진한 사랑을 기대하진 않았다. 세상을 잘 재현하자는 마음뿐이었다. 무시무시하게 지루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래도 쉽게 만들 수 없느냐’고 묻자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신이 그렇게 시킨다. <방독피>는 이 시대에 한 번은 꼭 나와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어렵다고는 하지만 <고갈> <방독피> 등은 이들의 초기작에 비하면 정연한 내러티브를 갖춘 편이다. 김선은 “내러티브가 영화의 이미지 구축에 해가 되는 영화가 있고 도움을 주는 영화가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영화를 다 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조만간 대기업이 투자한 상업영화를 내놓을 것이란 점이다. 그룹 티아라의 함은정, 황우슬혜 등이 출연하는 공포영화 <화이트>다. 지금까지 만든 모든 영화의 제작비를 합쳐도 <화이트>의 절반에 미치지 않는다. 





촬영 막바지 단계라는 <화이트> 때문에 김곡은 부산에 내려오지 못했다. 김선도 <방독피> 상영 다음날 새벽 기차를 타고 귀경해야 했다. “상업영화라서 다른 건 못느끼겠다. 어떤 영화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영화 작업 자체는 똑같다”고 김선은 말했다. 

김선은 근사한 말들을 많이 했다. 때로 독특하게 높은 톤으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는 극중 주상근 의원이 겪는 불안한 하루를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빗대 설명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집에 가고 싶은 어린애” 같다고 해석했다. 영화 속에는 “세상엔 깨끗한 사람과 지지한(지저분한) 사람 사이의 휴전선이 있다. 투표일은 그 경계가 흐릿하게 사라지는 날”이라는 대사가 있다. 

“일본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는 이런 말을 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건 죄를 짓는 일이다’. 졸X 맞는 말이죠. 독립영화계는 좀 더 공격적이고 불법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해요. ‘윗분’들이 보면서 ‘이거 불법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