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몇 편 읽어왔다. 영화로도 제작된 <더 로드>(2006)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보다는 한국에 번역된 작품 중에는 가장 먼저 쓰여진 <핏빛 자오선>(1985)을 '압도적'이라 느끼며 읽었다. 찾아보니 예전에 쓴 짤막한 평이 있다. 나 자신의 말을 뻔뻔하게 인용하자면 <핏빛 자오선>에 비하면 <더 로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왜 썼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카운슬러>는 맥카시의 시나리오다. 2013년 출간됐고, 리들리 스코트가 같은 해에 영화로 선보였다. 찾아보니 맥카시는 2011년에도 토미 리 존스가 연출하고 주연까지 맡은 <The Sunset Limited>라는 텔레비전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 평가도 알 수 없다. 마이클 파스밴더, 하비에르 바르뎀, 카메론 디아즈, 페넬로페 크루즈,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카운슬러> 역시 그 화려한 연출자, 배우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개봉관에서 내려졌던 것 같다. 



디아즈(42)와 크루즈(40) 누님들.


IPTV로 영화를 보았고, 그런 김에 민음사에서 나온 시나리오까지 찾아 읽었다. 시나리오에는 있으나 일부 누락된 장면, 대사가 있지만, 구성이나 흐름은 대체로 같다. 좋은 배우들이 자신들의 스타일로 육화했기에 영화를 보면서는 그리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글로 읽으니 대사가 상당히 문어체인데다가 현학적이다. 현대 북미, 남미의 갱스터, 변호사가 쓸법한 말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카운슬러>는 영화보다는 연극에 어울리는 대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갱스터들간의 마약 쟁탈전, 그 사이에 끼어 이권을 노리는 조무래기들의 이야기는 브로드웨이보다는 할리우드가 좋아할법하지만.


'변호사'와 사랑하는 연인 로라의 뜨거운 침대 위에서 시나리오는 시작한다. (영화에선 파스밴더와 크루즈 커플) 둘은 곧 결혼을 약속할 사이임이 밝혀진다. 변호사는 로라에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청혼한다.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듯 보이는 이 남자는 그러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하는 중이다. 그는 남미의 어느 나라와 미국을 연결하는 대규모 마약 거래에 끼어 한 몫을 보려한다. 남자의 재정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사실은 몇 가지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갱스터로 보이는 동료 라이너(하비에르 바르뎀), 멋지게 차려입은 마약 중개인 웨스트레이(브래드 피트)는 변호사에게 몇 차례나 되묻는다. 정말 이 일에 끼어들려 하냐고. 변호사는 자못 확신에 차있다. 그러나 변호사는 불과 며칠 뒤 자신이 겪을 지옥을 알지 못한다.  



상황 파악을 못한 변호사(오른쪽)에게 충고하는 마약중개인. 


중반 이후는 이 변호사가 겪는 지옥이 묘사된다. 변호사는 잠깐 발을 헛디뎠을 뿐이지만, 결과는 발목을 삔 것 이상이다. 자신만 다치면 그뿐이지만, 그의 운명은 주변 모든 사람을 잡아삼킨다. 사실 변호사가 잘못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단지 남들 다 하는 일을 해보려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 해를 끼친 것도, 불온한 의도도 없다. 모든 것이 우연이었고, 누군가의 음모였다. 그러나 갱스터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무고함도 믿지 않는다.  



웨스트레이 : 글쎄. 나야 자네가 무관하다고 기꺼이 믿고 싶지만 자네가 확신시켜야 하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내가 아니야. 

변호사       : 하느님 맙소사, 대체 뭘 확신시켜요?

웨스트레이 : 이 모든 일이 그저 일종의 우연이었다는 점. 그자들은 우연이라는 걸 믿지 않지. 우연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나쁜 일이 벌어졌지만, 갱스터(혹 세계)는 인과를 믿는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특정한 사람에게 귀속된다. 그가 죄를 저질렀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변호사는 보스와 전화를 할 기회를 얻는다. 이미 모든 일과 사람이 끝장난 뒤였지만, 그로선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잘못을 했다면 되돌릴 방법은 없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과 같이 전지전능하고 시인과 같이 유려한 언어를 구사하며 철학자처럼 통찰있는 이 보스는 변호사의 바람이 헛된 것임을 알려준다. 변호사와 보스의 대화는 <카운슬러>의 주제를 요약한다. 



변호사 : 날 도와줄 겁니까?

헤페(스페인어로 보스) : 현 상황의 진실을 확인해 보라고 권해 드리지, 변호사 양반. 이것이 나의 충고요. 나로서는 뭘 해야 했다고, 또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당신이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찾고 있는 세상은 그 실수가 행해진 세상이 아니라는 거요. 지금 당신은 교차로에 서서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소. 하지만 선택이란 없지. 그저 받아들여야 할 뿐. 선택은 이미 오래 전에 행해졌으니. 

(...)


변호사 : 아까 나더러 그랬잖습니까. 지금 교차로에 서 있다고.

헤페    : 그렇소.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오. 세상을 실제보다 더 어둡게 묘사하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세상이 어둠에 잠식당한 지금, 세상이 사실상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졌소. 사실 세상은 바로 나 스스로가 창조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 세상 역시 마찬가지요. 다른 세상들이야 있소. 당연하지.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당신 자신의 세상일 뿐이지. 당신이 죽으면 그 세상도 사라지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소. 



헤페의 대사는 <맥베스>의 레이디 맥베스가 처음 한 것으로 기록된 "What's done is done"이란 서양의 오랜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은 너그러움을 알지 못한다. 행해진 것은 되돌릴 수 없다. 어딘가의 누구에게 하소연해도 소용없다. 한 사람이 사라지면 그의 세계도 사라진다. 그 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은 다른 세계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시나리오에는 목 잘린 시체가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장면, '처리'되어지길 바란 누군가의 시체가 남미, 북미 대륙을 오가는 분뇨차 속 드럼통에 실려 조금씩 부패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무서운 건 이런 장면들이 아니라 헤페의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