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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서적 북디자이너는 수도사와 같다. 콜롬비아대학출판사 북디자이너 이창재씨






이창재씨는 미국에서 e메일을 보내 자신의 전시회 소식을 미리 알려왔다. 아마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보도자료는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이뤄져 있었다. 사실 재미교포에 대한 선입견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이창재씨는 재미교포 하면 떠오르곤 하는 과장된 쿨함, 느끼함이 없었다. 중학교 때 이민 갔다고 하는데 한국어 어휘, 발음이 모두 정확했다. 물론 북디자인도 한국의 많은 학술서들과는 달리 아름다웠다. 






1996년 미국 뉴욕의 예술대학인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이창재씨(49)는 두 군데 직장에서 면접을 봤다. 모두가 웹 디자인에 눈을 돌리고 있어 프린트 디자인을 지향하는 이는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콩데나스트는 한때 100종 이상의 잡지를 발행한 거대 출판 기업이었다. 으리으리한 건물에 들어가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온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8등신 모델들 사이로 세련된 옷차림의 편집자들이 종종 걸음을 치고 있었다. 콜롬비아대학 출판사는 반대였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원고뭉치 사이에 앉은 백발 성성한 편집자들이 새로운 구직자를 힐끗 쳐다봤다. 아트디렉터인 면접관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들뢰즈와 가타리 등의 저서를 내밀며 “이런 책을 만드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씨는 콜롬비아대학 출판사를 선택했다. ‘수도사’처럼 20년을 일한 그는 지금 그곳의 수석 북디자이너로 재직중이다.


20일 서울 합정동 갤러리 사각형에서 개막된 ‘책을 만들고 보는 열 세가지 방법-컬럼비아대학출판사 북디자인, 1990~2015’전(30일까지)에는 이창재씨와 그의 동료들이 디자인한 책 120여권과 표지, 자료 등이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씨는 “이번 전시를 통해 미주 한국학의 발전적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합정동 갤러리 사각형에서 만난 컬럼비아대학출판사 수석디자이너 이창재씨. 손을 올리고 있는 왼쪽 책무더기는 일본학 관련, 오른쪽 책무더기는 한국학 관련 서적이다. 같은 주제의 책들인데 저렇게 양적 차이가 난다. /강윤중 기자


 

미국의 출판 생태계는 대형 상업출판사, 독립출판사, 대학출판부(사)로 나뉜다. 2013년 영국의 펭귄과 미국의 랜덤하우스가 합병해 직원수만 1만여명에 이르는 대형출판사가 탄생한데서 보이듯, 상업출판사의 위세는 엄청나다. 하지만 130여개의 대학출판사도 세력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학술서, 교재는 물론 대중인문서도 펴낸다. 컬럼비아대학 출판사는 1893년 설립돼 12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매년 180여종의 신간을 낸다. 대학으로부터 재정과 경영이 독립돼 있으며, 비영리적 목적을 강조한다.


‘비영리적’이라는 말을 ‘디자인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거나 ‘안팔려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번 전시회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미국 대학출판사의 책은 여느 상업출판사의 책 못지 않게 아름답다. 특히 화려하기보다는 정갈하게 책의 뜻을 전달하는데 강점을 보인다. 이창재씨는 “디자이너는 저자와 독자의 만남을 돕는 매개자”라며 “나만 해도 책 표지가 안 예쁘면 사기도 싫다”며 웃었다.


이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님을 따라 도미했다. 여느 재미교포들처럼 그의 부모님도 아들이 안정된 직장을 갖기를 바랬고, 이씨 역시 대학의 프리메드(Pre-Med) 과정에서 의사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나 우연히 들은 미술사 과목이 그의 진로를 바꿨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사주신 동시집 <일하는 아이들>(이오덕 엮음) 초판본을 보물로 간직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던 그는 미술과 책이 결합된 직업인 북디자이너가 됐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작가·학자의 저서들이 서서히 번역되고 있다는 데서 한국적 문화 배경을 갖는 이로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이태준의 <무서록>,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김소월의 시집 등 번역되는 작품마다 디자인을 도맡았다. “디자인을 통해 책의 역사적 배경을 전달하고 싶다”는 그는 추사 김정희, 김환기, 임옥상, 신학철 등 한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표지에 사용했다. 초창기엔 출판사 컴퓨터에 한글 프로그램도 깔려 있지 않았다. 손글씨로 편지를 쓴 후 스캔한 뒤 파일을 이메일에 첨부해 한국 예술가들에게 보내 작품 사용 허락을 받아냈다.




이창재씨가 디자인한 표지들. 위로부터 이태준의 <무서록>,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믿기지 않는 믿음의 필요>. 마케터들은 최윤의 소설이 <꽃잎>으로 영화화됐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 스틸을 쓰자고 했으나, 이창재씨는 "영화 스틸 쓰는 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창재씨 제공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일본, 중국 작품에 비하면 한국 문학 번역은 갈 길이 멀다. 이씨는 10년 남짓한 역사를 지닌 한국문학번역원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통합시키려는 정부의 아이디어가 “안타깝다”고 했다. 이씨는 “일본은 이미 노벨문학상도 여러 차례 받았고 상업출판사까지 일본 문학을 번역하지만, 여전히 국가가 설립한 문학번역원에서 번역을 지원한다”고 전했다.


미국에서도 영상매체의 위력은 책의 영향력을 넘어선다. 한국의 ‘스크린셀러’처럼, 영화에 기대 책을 판매하려는 시도가 잦다. 영화의 원작 소설이기도 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표지에 극중의 케이트 윈슬렛이 욕조에 앉아있는 스틸 사진을 쓴 것이 한 사례다. 하지만 대학출판사는 이같은 마케팅 기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이씨는 “영화 사진은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년간 세계의 저명한 작가, 학자의 책을 만들어왔다. 이씨는 일본의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을 “가장 까다로웠던 저자”로 꼽았다. 가라타니는 자신의 저서 <역사와 반복> 표지 디자인을 수차례 반려했고, 영문 표기도 일본식의 ‘가라타니 고진’이 아니라 영미식의 ‘고진 가라타니’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의 제목은 손글씨로 썼는데, 발리바르는 잉크가 번진 듯한 글씨체가 “핏방울을 떠오르게 한다”며 만족했다고 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의 표지 시안들. 가라타니는 맨 위의 것, 중간 것을 차례로 반려했고, 그 결과 가장 아래 것이 채택됐다. 그 과정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저자의 요청에 따라 '고진 가라타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