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보니, 감독은 이 영화의 전형성에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아무튼 그 목적은 일정 부분 달성됐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무서웠으니까. 



재난영화인 줄 알았는데 공포영화다. 어쩌면 ‘한국의 원자력발전 정책 비판’이라는 뚜렷한 목적의 프로파간다 영화다.

총제작비 150억원대가 투입된 한국 영화 <판도라>가 29일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경남 어느 지역을 연상시키는 40년 된 원전 소재지가 배경이다.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가져다 준 얼마간의 일거리에 반색하면서도, 노후한 원전의 안전성이 늘 불안하다. 원전 노동자들은 출근할 때마다 원전 폐쇄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힘겹게 뚫어야 하는 상황이다. 어느 날 이 지역에 예기치 못한 지진이 발생한다. 지진으로 인한 직접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원전이 극도로 불안해진다. 원전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전이 폭발해 방사능이 누출된다. 주변 주민은 물론 전국이 공포의 도가니에 빠진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부 역시 거대한 재난 앞에 무기력할 뿐이다.

<판도라>가 마스크 쓴 살인마, 좀비, 유령이 출몰하는 공포영화보다 공포스러운 이유는, 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원전 사고의 가능성이 매우 높지는 않겠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역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박정우 감독은 시사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영화 배경은 90%가 현실적이고, 사고 이후 벌어지는 상황, 양태는 최대한 과학적·논리적 틀 안에서 구현했다”고 말했다.






지진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였다면, 원전 재앙을 키우는 것은 인간이다. 정부는 전문성이 전혀 없는 ‘낙하산’ 인사를 소장으로 앉히고, ‘예스맨’들을 간부로 기용한다. 오히려 원전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전문가들은 한직으로 발령낸다. 사고 수습도 엉망이다. 

대통령은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실세 국무총리는 “국가 경제”라는 명목으로 사고를 덮으려고만 든다. 주민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거나, 사건을 보도하려는 언론을 ‘유언비어’ 운운하며 통제하려는 건 최근 한국 재난영화 속에서 자주 묘사된 정부의 모습 그대로다. 

<해운대> <터널> 같은 재난영화와 달리, <판도라>에는 유머가 거의 없다. 지진이 일어나는 20여분쯤부터 끝날 때까지 원전 사고와 그에 이어지는 전국적인 패닉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상영시간 136분의 상업영화로서는 모험적인 일이지만, 제작진은 무능한 정부 대신 직접 원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뛰어든 하청업체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묘사로 영화에 온기를 남기려 한다. 가족애라는 감정으로 끈끈함을 더하는 건 대부분의 한국형 재난영화가 취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따져보면 <판도라>에 새로운 건 ‘원전 재난’이라는 소재뿐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컨트롤타워,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소시민 영웅들, 그들의 친구와 가족이 보여주는 우정과 사랑 등은 모두 익숙한 요소들이다. 길고 감상적인 음악과 함께 관객의 누선을 자극하는 방식 역시 새롭지 않다. 말하자면 <판도라>는 ‘공식’에 충실한 영화다.

영화가 끝나면 “한국은 원전 밀집도 1위 국가”라는 내용의 자막이 흘러나온다. 한국이 원전을 폐쇄하기는커녕 신규 원전을 짓고 있다는 사실도 친절히 알려준다. 극중 인물들도 원전의 위험성을 어색할 정도로 상세히 설명한다. 제작진은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안전한 나라”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클리셰와 설명은 감수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김남길, 정진영이 원전 직원을 연기하고, 김명민이 대통령 역으로 특별출연한다.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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