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몇 편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다지 재미없었다는 인상만 남았다. <나사의 회전>이든, <아메리칸>이든 마찬가지였다. <나사의 회전>은 '유령 나오는 이야기'였다는 기억은 나는데, <아메리칸>은 심지어 읽었음에도 어떤 내용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제임스는 '영문과 학생들이 보면 되는 작가'로 인식하고 있었던 터. 

보르헤스가 선별한 제임스의 단편집  <친구 중의 친구>를 읽고선 마음이 바뀌었다. 제임스는 절정의 리얼리스트이자 이른 모더니스트로 평가받지만, 보르헤스는 제임스의 이야기 중에서도 환상 소설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을 골라냈다. 더욱 내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제임스가 자신의 소설을 결말 직전까지 리얼한 방식으로 끌고 가다가, 뜬금없이 환상적인 요소를 삽입해 마무리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으면 독자는 황당해하면서 화를 내거나, 기발하다며 무릎을 치는데 나는 후자였다. 독자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작품은 훌륭하다. 

내친 김에 예전에 챙겨둔 중편 <데이지 밀러>도 꺼내 읽었다. '데이지 밀러'는 인습이라든지 주변의 시선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당차고 천박한 미국 아가씨의 이름이다. 역시 미국 출신인 청년 윈터본은 유럽에서 데이지를 만나 그의 아름다움에 반하지만, 결국 그녀의 지나친 관습파괴적인 행동에 질려 그녀에게 관심을 끊는다. 데이지는 잘생긴 이탈리아 청년과 데이트를 즐기다가 열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만다. 윈터본은 데이지의 때묻지 않은 진심을 뒤늦게 알아채지만, 삶은 죽은 사람을 뒤로 하고 그대로 흘러간다. 

데이지 밀러는 많은 남자들이 수작을 걸어보고 싶은 그런 아가씨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지금'을 즐기길 주저하지 않고,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으며, 무엇보다 아름답다. 이런 사람하고 연애를 한다면 사회의 인습, 관습 때문에 가끔 곤란한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독립적이고 매력적이다. <데이지 밀러>에는 그런 여자에 대한 윈터본의 양가 감정,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만 조금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는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작가 제임스는 윈터본의 내면과 외면을 오가며 오락가락하는 윈터본의 마음을 모호하면서도 정확하게 전달한다. 

펭귄 클래식의 장점 중 하나는 서문이 충실하다는 것이다. 서문을 쓴 영국 왕립 문학 협회 회원 데이비드 로지는 제임스가 이성애자이면서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E.M. 포스터가 이성애적 사랑에는 실제로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작품 속에 그것을 재현하는 척해야만 했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제임스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연애할 때의 미묘한 감정을 그린 소설을 잘도 써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 불신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이 영원한 독신남 주인공들은 작가 자신의 대리인"이기도 한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초상사진. 데이지 밀러 같은 아가씨가 선뜻 좋아할 만한 인상은 확실히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