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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보여주마, 홀로코스트에 대한 두 영화



<사울의 아들>을 보는 건 물론 괴롭다. 하지만 대단한 경험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의 예술가들에게 홀로코스트 재연은 거대한 의무이자 힘겨운 도전이었다.

홀로코스트의 안과 밖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영화 2편이 잇달아 개봉한다. 헝가리 출신 감독 라즐로 네메스의 데뷔작 <사울의 아들>(25일 개봉)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 발생 70년이 넘어 차츰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는 홀로코스트를 전면에 부각시킨 영화다. 

<자전거 도둑>으로 유명한 비토리오 데시카의 <핀치 콘티니의 정원>(3월3일 개봉)은 제작 46년 만에 국내에 정식으로 공개된다. 죽기 4년 전 만든 이 영화에서 데시카는 유대인 박해를 모른 척했던 이탈리아인들의 죄책감을 드러낸다.

■지옥의 한가운데-사울의 아들

1944년 아우슈비츠. 사울은 수용소 내 시체 처리 등의 일을 하는 ‘존더코만도’다. 어느 날 가스를 마신 뒤 죽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이가 발견된다. 나치 의사는 곧 아이를 죽이지만, 사울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챈다. 사울은 시체를 빼돌린 뒤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마음먹는다.


'답답함'을 강조한 4 : 3 비율 화면


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학살을 막으려 한 선인(<쉰들러 리스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피해자(<피아니스트>),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인생은 아름다워>) 등을 등장시키는 우회적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간다. 제작진은 영화를 찍기 전 원칙을 세웠다. ‘카메라는 항상 사울을 따라다녀야 하며 그의 시야, 청각, 실재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 것.’ 카메라가 대부분의 장면에 등장하는 사울에게 포커스를 맞추기에, 사울 주변에 가득한 시체 더미는 희미하게 보인다. 시체의 모습은 희미하지만, 가스실에 들어간 유대인들의 절규, 구토, 문 두드리는 소리는 또렷하게 들린다. 여기에 나치 군인의 단호한 명령, 시체 옮기는 소리, 핏물이 흐른 바닥을 솔질하는 소리가 층층이 겹쳐지면서 지옥의 소리 풍경이 형성된다. 

<사울의 아들>이 홀로코스트 현장을 생생히 재연한다고 해서 이를 통한 충격 효과를 지향한다는 건 아니다. 자신의 목숨조차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울은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쓴다. 영화 후반부엔 이 장례의 필요성이 모호해지기까지 하지만, 사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짐승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지켜야 할 덕목이 있기 때문이다. <사울의 아들>은 지옥에서도 간직해야 할 인간의 조건을 묻는다.

■우아하지만 처절한 몰락-핀치 콘티니의 정원

1930년대 말 이탈리아 페라라. 나른하고 서정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이탈리아 특유의 밝은 햇빛이 아름다운 정원을 내리쬔다. 싱그러운 표정의 젊은 미남·미녀들은 명품 스포츠웨어 화보에 등장할 법한 하얀 셔츠와 바지를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있다. 부유하고 교양 있는 유대인 가문 핀치 콘티니가의 미콜, 알베르토 남매는 세상사에 무심하다. 정문에서 자전거를 타고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대저택에서 남매는 연일 테니스를 치거나 친구들을 불러 만나는 등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핀치 콘티니가의 평화에는 조금씩 균열이 간다.

스포츠웨어 화보 같은 <핀치 콘티니의 정원>의 도입부. 

<핀치 콘티니의 정원>은 밝은 도입부에서 시작해 암울한 바닥으로 조금씩 하강하는 줄거리 구조를 갖는다. 무솔리니 정권하 유대인들은 학위를 받을 수 없게 되고, 도서관에서 추방당하고, 아리아인과의 결혼이나 아리아인 하녀를 두는 것이 금지된다. 핀치 콘티니가 사람들은 테니스 클럽에서 제명되자 “집에서 치면 되지” 하는 식으로 태연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거대하고 안락한 저택조차 영원히 안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핀치 콘티니의 정원>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경찰에 끌려갈 때조차 기품 있는 검은색 정장을 입는다. 그러나 핀치 콘티니의 세계는 더없이 아름답고 정교한, 그래서 아이들의 짓궂은 손짓 한 번에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 같다. 이 아름다운 세계가 천천히, 낱낱이 파괴되는 과정을 데시카는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세상사에 무관한 섬은 없으며, 작은 균열은 쉽게 큰 붕괴로 이어진다는 깨달음도 함께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