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미지

죽이지 않는 자객, <자객 섭은낭>




허우샤오시엔 8년만의 신작. 아름답고 낯설고 때로 길게 느껴지는 무협영화다. 한참 싸우다가 그냥 아무일 없었다는 듯 가버리는 섭은낭이 인상적이다. 



<자객 섭은낭>은 이상한 무협영화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경공술이 없고, 강호의 도리를 설파하는 협객도 없다. 게다가 주인공은 사람을 죽이는데 실패하기 일수인 자객이다. 


감독의 이름을 들으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비정성시>로 유명한 대만 감독 허우샤오시엔(侯孝賢·69)이다. 지난해 제68회 칸국제영화제는 <빨간 풍선>(2007) 이후 8년만에 돌아온 명장에게 감독상을 주며 환영했다. 


9세기 당나라. 섭은낭은 위박 지역의 맹주인 전계안과 정혼했다가 파혼당한다. 전계안의 모친인 가성공주가 아들을 세력가의 딸과 결혼시키길 원했기 때문이다. 섭은낭은 가성공주의 쌍둥이 동생인 가신공주에게 맡겨져 무공을 연마하고 자객으로 성장한다. 가신공주는 검술은 완벽하지만 마음은 강하지 않은 섭은낭을 시험하고자, 전계안을 제거하라는 명을 내린다. 





무협은 중화권 영화를 대표하는 장르지만, 허우샤오시엔에겐 첫 도전이다. 하지만 느릿하고 관조적인 허우샤오시엔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살을 베는 칼, 뿜어져 나오는 피, 처절한 얼굴 표정은 찾을 수 없다. 대신 이 영화 속의 싸움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심상하다. 섭은낭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다. 칼과 칼, 주먹과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 역시 다른 자연의 소리 속에 섞여든다. <자객 섭은낭>에선 빗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으면 중국의 어느 심산유곡을 담은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착각할지도 모른다. 


섭은낭은 모호한 캐릭터다.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마음, 옛 정혼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암살을 포기하고 물러날 때도 분함, 사부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 도덕적 갈등을 표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스윽 물러날 뿐이다. 정치적 음모, 처첩의 질투, 사악한 도술이 어지럽게 얽힌 강호에 섭은낭이 설 곳은 없어 보인다. 섭은낭이 암살의 무용함을 논하자, 스승인 가신공주는 “검은 무정하니, 성인군자의 근심과는 다른 법”이라고 질책한다. 섭은낭은 이름 그대로 은둔(隱)하는 여자(娘)가 된다. 





<밀레니엄 맘보>(2001), <쓰리 타임즈>(2005)에 이어 세번째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 출연한 수치(舒淇)는 다양한 표정을 가진 배우지만, 섭은낭을 연기하면서는 거의 아무런 연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사도 많지 않은 섭은낭은 때로 유령 같고, 때로 스치는 바람 같다.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허우샤오시엔은 “무협영화를 많이 봐왔지만, 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리얼리즘”이라고 했다. 세트는 모두 야외의 공터에 지었다. 스튜디오 안에 지으면 조명과 음향을 통제하기 쉽지만, 야외의 빛, 바람, 소리를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좋은 리얼리스트는 현실의 제약을 자유로운 창작의 조건으로 승화시킨다. 허우샤오시엔은 “제약이 없으면 표현의 자유도 없다. 제약이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생각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을 연구한다”고 했다. 등장인물이 수십 m 날아가지 않고, 역사적 사실도 바꾸지 않는다.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중력의 법칙을 따르고, 당대의 생활상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 허우샤오시엔은 현실에 기반한 자유가 진짜 자유라고 생각한다. 









허우샤오시엔은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또다른 영화들, <비정성시>처럼 대만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의 아이디어를 두루 갖고 있다고 한다. 다만 현대사를 직접 다룬 영화의 경우, 투자받기가 쉽지 않아 제작에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자객 섭은낭>은 2월 4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