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을 읽으면서 한결같이 주옥같은 작품들만 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에, 몇 편에서라도 번뜩이는 인상을 얻으면 만족하는 편이다. 장편은 읽는데 어느 정도의 노력, 시간을 투자해야 하므로 그만큼 기억에도 남는 반면, 쉽게 읽히는 단편은 쉽게 잊힌다. 이지 컴, 이지 고. 


<안 그러면 아비규환>은  "영미권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작정하고 쓴 ‘장르’ 단편소설 모음집"를 표방한다. '공포'라는 주제 외엔 공통점이 전혀 없는 단편집이라고 홍보되지만, 어떤 것들은 별로 공포스럽지도 않다. 


제목을 표제로 따온 닉 혼비의 '안 그러면 아비규환'은 티비 시리즈 <환상특급>의 한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였다. 별 볼일 없는 15살짜리 남자 아이가 교내의 퀸카 여핛생과 섹스를 하게 된 사연을 1인칭의 구어체로 풀어놓는다. 남자 아이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우연히 얻게 되었고, 그것이 여학생과의 연결 고리가 된다. 이 이야기가 <환상특급> 같다고 한 이유는 결말이 어딘지 80년대 <환상특급>의 한 에피소드였던 '좀 평화롭고 조용하게'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안 그러면 아비규환'의 상황이 좀 낫긴 하지만, 파국의 결말은 아무튼 마찬가지. 난 80년대의 <환상특급>을 좋아했다. (얼마전 우연히 다시 찾아본 2000년대의 <환상특급>은 봐주기 힘들었다) 닉 혼비의 이 소설도 산뜻한 오프닝이었다. 


데이브 에거스의 '정상에서 천천히 내려오다'는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는 여성 등산객의 이야기다. 작가는 아마 킬리만자로에 올라봤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런 글을 썼다고 믿기 어려울만큼 생생하다. 모든 소설이 그러하겠지만 짧은 분량에 인상을 남겨야하는 단편은 결말의 마지막 한 페이지가 정말 중요한데, 이 작품도 하산 후의 허무하고도 쌉사레한 느낌을 그럴싸하게 살렸다. 글렌 데이비스 골드의 '스퀸크의 눈물, 다음에 일어난 일'은 코끼리의 교수형이라는 부조리한 사건을 무심코 던져놓은 뒤, 중반 이후엔 추리소설처럼 전개했다. 그래서 작품의 전반과 후반이 다른 느낌인데, 그 접합부가 나쁘지 않다. 


크리스 오퍼트의 '척의 버킷'은 시간여행물이다. 시간여행이란 버킷 안에 담긴 대걸레의 가닥처럼 종잡을 수 없는 평행우주로 뻗어나간다는 아이디어다. 난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살아갈 것 같긴 하지만(좋아서가 아니라 그렇게밖에 되지 않아서), 이 소설에는 시간여행을 한 주인공의 25가지 다른 인생의 모형이 간략하게 제시돼있다. 인생은 그렇게 우연히 결정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짐 셰퍼드의 '테드퍼드와 메갈로돈'은 충분히 예상가능했던, 그러나 역시 어이없었던 마지막 한 문장 떄문에 기억에 남는다. 로리 킹의 '어둠을 잣다'는 독서의 몰입도,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이 소설집 중 가장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레즈비언 소설, 장애인 소설이자 기발한 스릴러라 할 수 있는데, 난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서 그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고 작가가 그런 사람의 묘사에 성공한 것 같아서 읽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