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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다. 지난 대선의 '멘붕' 이후 책 제목에 끌려 읽었다는 분들도 있었지만, 난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은 김에 읽었다. 전작이라 할 수 있는 <고민하는 힘>에서도 강상중은 나쓰메 소세키, 그리고 막스 베버를 통한 '철학적 자기계발서'를 내놓았던 것이다. 


일본판 제목은 <속 고민하는 힘> 정도인데, 한국에서 번역돼 나오면서 제목이 바뀌었다. 난 한국 편집자의 센스가 돋보인다고 생각하며, 지난해 방한 때 강상중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한국판이 일본판과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서문에서 아들의 죽음(자살)을 밝힌 것이다. 전해 듣기로 그의 아들은 극심한 우울과 비관에 빠져 세상과의 교류를 거의 차단한 상태였고, 상태가 조금 나아지려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강상중은 일본에서 진지한 토론 프로그램은 물론 홍백가합전 같은 예능 프로에 심사위원으로 나갈 정도로 유명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아들이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몇몇 지인들만 알고 있다고 한다. 일본판에서는 아들의 죽음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3.11 대지진 이후 출간됐으니, 일본인에게는 자연 재난 이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책으로 받아들여질테지만, 사실 이미 떠난 아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메시지도 있는 셈이다. 


그러한 배경을 안 뒤 조금은 숙연한 마음으로 책을 넘겼다. 나쓰메와 베버에 대한 천착은 비슷하고, 여기에 윌리엄 제임스나 빅토르 에밀 프랑클이 추가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지점에서 필요한가 하는 점일 테고. 


강상중은 지금이 '비상사태'라고 말한다. 전지구적인 금융위기가 발발한데 이어, 일본에선 유례 없는 재난까지 겹쳤다. 그러나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은 올라갈데로 올라간 상태다. 50년 전이라면 그럭저럭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을 살아도 지금은 턱도 없다. 


강상중은 우리 시대 '고민의 씨앗'을 세 가지로 파악한다. 첫째는 대체로 동의할만한 '악마적인 카지노 자본주의'이며, 둘째는 '익명의 군중의 탄생'이다. 이 대목은 좀 흥미로운데,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 사회는 곧 "사람과 사람의 연결에서 어떤 중개도 필요 없게 된다"고 할 수 있는 '직접 접근형 사회'다. 이런저런 거추장스러운 매개가 없어졌다는 점에서 개인에게 좋은 사회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매개가 없는 이상, 개인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이 모든 것을 홀로 선택할 수 없고, 그래서 타인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곧 포퓰리즘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포퓰리즘은 시장의 반응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세번째는 앞의 두 이유와도 관련 있는 '공공 영역의 축소'다. 


강상중은 찰스 테일러의 '개인적 공명'(personal resonance)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공적 전통이 무너진 사회에서 인간적 선을 되찾기 위해서는 개인적 공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쓰메의 <마음>에는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신용하고 죽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 단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되어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진지합니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진지함에 의한 개인적 공명. 그럴 듯한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 말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는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으려하기보다는 그저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가자. 그런 '태도'가 중요하다.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정도로 요약된다.


그가 제시하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받아들여 삶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스치듯 읽고 지나갈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배경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얻고, 또 그 사이 생각이 많아졌기 떄문인지 <고민하는 힘>보단 더 즐겁게 읽었다.  





아래는 지난해 11월 강상중 교수의 내한 기자회견 기사.  





강상중 도쿄대 교수(62·사진)는 근 몇 년 사이 두 가지 커다란 충격에 직면했다. 하나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난해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이다.

극복하기 쉽지 않은 두 번의 충격을 경험한 강 교수의 신간 제목이 <살아야 하는 이유>(사계절)란 것도 의미심장하다. 책은 2009년 출간돼 일본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고민하는 힘>의 후속작이다.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난 강 교수는 197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뒤 자신의 존재를 새로 인식하고 한국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독일 뉘른베르크대학에서 정치학·정치사상사를 전공했고, 1998년 재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됐다. 그는 일본과 동북아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주면서 주류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는 ‘스타 지식인’이다. 현재 경향신문에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강상중 교수가 5일 내한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강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 따로 언급한다. 극도의 신경증에 걸린 아들은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 자신의 파멸과 세계의 파멸을 함께 바랐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고, 아버지에게도 수차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가까스로 세계,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던 아들은 그러나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 언제까지고 건강하기를,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리고 얼마 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해 2만명 가까운 생명이 사라졌고, 원전사고까지 이어졌다. 이토록 “납을 삼키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끝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을 구하기 위해 강 교수는 전작과 같이 다시 한번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를 경유한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1905년, 나쓰메는 “일본은 멸망한다”고 말했다.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는 자신감에 들뜬 당시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관적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 뒤, 일본은 실제로 한 차례 망했다. 강 교수가 나쓰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직한 비관론’이다. 

그는 현재 세계의 상태를 ‘부드러운 제노사이드’라고 이름 붙였다. 유럽, 미국, 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갑작스러운 경제 파탄에서 자유롭지 않다. 청년실업, 계층 간 격차, 고용불안 등은 전 세계의 문제가 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처럼 갑작스럽고 극단적인 죽음이 닥치지는 않겠지만, 세계 곳곳에는 비참함이 스멀스멀 퍼져 있다. 강 교수는 “이러한 만성적 불안의 시대에 안이한 낙관론을 처방이라고 내놓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범죄”라고 말했다. 

‘고민’은 그의 힘이다. ‘재일동포’라는 정체성을 깨닫고서부터 강 교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 아무것도 아닌가”라고 그는 수없이 고민했다. 그에게 인생은 이렇게 ‘던져지는 물음에 하나씩 답해가는 것’이다. 행복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들에 천천히 답할 때 결과적으로 나타난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 태도의 결과가 행복이다. 

한국과 일본은 수십년 전과 비교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일본은 지난 15년간 매년 3만명이 자살했다. 강 교수는 “15년간의 자살자 수에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 10배, 그들과 친한 사람이 10배라고 계산하면 일본 인구의 절반이 죽음의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행복한 이와 불행한 이 사이의 ‘분단선’이 고착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불행한 사람에 대해선 운이 나빠서 혹은 능력이 없어서라고 치부하고, 혹시 죽더라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말라”는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세상을 등지려는 사람, 불안을 짊어지고 고통을 겪는 이의 존재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일본에서도 대지진 직후에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이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목소리는 잦아들고 한국, 중국과의 외교 갈등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적 감정만이 팽배하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 대해서 강 교수는 오키나와의 반미 시위, 도쿄에서의 반원전 시위 등이 그에 대한 대안 운동이라고 파악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이 독도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민족주의적 분쟁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진단했다. 

강 교수는 “미래는 밝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그럼에도 살아나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은 이루지 못한 소망이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생에 대해 ‘예스’라고 응답하자”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