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다들 제라르 드파르듀가 나온 <시라노>를 본 것 같다. 그 느낌을 되살려 영화를 만들었는데 여전히 흥행한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오랜만에 흥행한 로맨틱 코미디다. 스릴러도 좋지만 로맨틱 코미디도 좀 나왔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나오고 있다. 내년 이맘때쯤엔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가 지겨워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래 글의 결론은 아래 사진처럼 앉아있는 여자를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것!



 
시라노는 필요합니까. 첫사랑 찾기 사무소를 열어야 했습니까.

<시라노 연애조작단>과 <김종욱 찾기>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일종의 ‘연애 대행업’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가을 개봉해 흥행에도 성공한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19세기 프랑스 희곡에 느슨하게 기반을 두었습니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갈 자신감이 없는 시라노는 잘생긴 부하의 연애편지를 대필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발산합니다. 영화에는 마음에 둔 여자에게 다가갈 용기와 방법이 없는 남자에게 연애기술을 전수해주는 대행소가 등장합니다. 소형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프로페셔널들의 조언에 따라 의뢰인은 여자를 사로잡기 위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김종욱 찾기>의 주인공 한기준은 많은 이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기억 속 아련한 첫사랑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해 ‘첫사랑 찾기 사무소’를 냅니다. 의뢰인들은 첫사랑의 행방을 알지 못해 사무소를 찾지만, 아마 안다 해도 직접 다가가기가 어려워 대행소를 거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잇달아 나온 이런 영화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풍경을 징후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나 나오는 얘기라며 황당하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유명 결혼정보업체의 이벤트 현장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말쑥한 차림의 선남선녀들이 모여 사회자의 재치있는 진행에 따라 이런저런 이벤트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로맨틱한 분위기에 의지해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점에서 결혼정보업체야말로 ‘연애 대행업’을 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작가 목수정은 최근작 <야성의 사랑학>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무작정 여자에게 다가가 차 한 잔 하자고, 당신과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한국 남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데서 책의 문제의식이 시작됩니다. 목수정은 사랑이라는 돌발적 충동을 이성으로 간신히 억누른 채 ‘스펙 쌓기’와 상대에 대한 저울질로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시대의 불안과 삶의 무게가 사랑을 방해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여자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기를 수백번 반복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강백호가 ‘빨간 원숭이’라 불릴 만큼 야성이 넘치는 남자이기 때문이죠. 현대 한국 사회 대부분의 남자에겐 그런 야성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은 상처에도 크게 앓을 만큼 면역력이 약해져 있습니다.

‘밀당’(밀고 당기기)이라는 연애 용어도 있던데, 지금으로선 미는 순간 튕겨져 나가는 남자가 대다수입니다. 이 약한 남자들에게 내성이 생기기를, 그들의 낯이 좀 더 두꺼워지기를 기다려봅시다. ‘대행업’을 통해서라도 연애를 하려 한다는 건 아직 우리에게 희망의 씨앗이 남아 있다는 얘깁니다. 대행업마저 없어진다면? 연애 불모지에 어떤 생명인들 살아남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