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 인터뷰. 윤여정의 캐릭터를 영화 캐릭터에 잘 녹여냈다. 윤계상이 이런 영화에 꾸준히 나오는 것 같아 좋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랑과 죽음.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고 운명이다. 두 가지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사이거나 성인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6일 개봉)엔 그런 사람이 나온다. 주로 탑골공원을 무대로 일하는 소영(윤여정)은 65세의 ‘박카스 아줌마’다. 노인들 사이엔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인기가 많다. 어느날 소영은 우연히 재회한 옛 ‘고객’ 재우(전무송)로부터 또 다른 고객들의 근황을 전해듣는다. 맞춤양복 아니면 입지 않는 깔끔한 신사였으나 이제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스스로 용변조차 볼 수 없는 노인, 쪽방촌에 살며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노인 등이다. 소영은 노인들의 부탁을 받고 그들을 진짜 죽여주기로 한다.

이재용 감독(51)은 장편 데뷔작 <정사>(1998)에서 시작해 <순애보>(2000),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같이 도회적이고 세련된 감성의 상업영화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세포소녀>(2006), <여배우들>(2010),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2013) 같은 실험적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죽여주는 여자>로 도착한 곳은 우리 사회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세계다. 성매매 할머니, 쪽방촌 할아버지, 트랜스젠더 가수, 장애인, 코피노 소년 등이 <죽여주는 여자> 속 세상의 구성원이다.본보기

“지금은 연로하신 부모님들께도 빛나는 시절, 사랑의 밀어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겠죠. 언젠가 함께 여행을 하던 어머니가 아이브로우를 사려다가 멈칫 하시더라고요, ‘세 개가 한꺼번에 들었네. 어차피 다 못 쓸 텐데….’ 그 말에 확 꽂혔어요.”

이재용 감독은 노인이 아니지만, <죽여주는 여자>가 그리는 노인들의 마음 풍경은 대단히 그럴싸하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 때, 기억을 잃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졌을 때, 노인은 어떤 생각을 품을까. 이런 노인들에게 빈곤이 겹쳤을 때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이재용은 ‘박카스 아줌마’를 만나거나, 빈곤층 노인에 대해 따로 시간을 들여 취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나 시사 다큐멘터리를 몇 편 본 것이 전부였다. 다만 지금까지 축적된 영화, 책 등을 통한 간접경험에 더해, 자신의 처지를 노인에 대입해 생각한 후 시나리오를 썼다. 그는 “6·25 겪어봐야 전쟁영화 찍을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왼쪽)과 배우 윤여정. 


영화 <죽여주는 여자>




극중 소영은 1950년 6월19일생으로 설정됐다. 전쟁 직전 태어나 전쟁고아가 됐고, 식모살이를 하다가 ‘양공주’로 변신했다. 미군과 동거해 아이를 낳았으나, 얼마 후 헤어진 뒤 아이는 곧바로 입양보냈다. 한국 현대사의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소영은 아이를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이재용은 소영에 대해 “꾸역꾸역 살아가지만 생명력 있는 여자,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은 자존감 있는 여자, 오갈 데 없는 코피노 어린이나 길고양이를 본능처럼 끌어안는 여자, 죽음을 부탁하는 무책임한 남자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강인한 여자”로 표현했다. 전무송은 대본을 읽은 즉시 “이 여자 천사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영은 예기치 않게 생긴 돈을 들고 조계사로 가 대부분을 불전함에 넣는다. 조계사 정문에는 당시 이곳으로 대피해 있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응원하는 손팻말 시위가 열리고 있다. 소영은 또 트랜스젠더, 장애인, 코피노 아이로 구성된 ‘유사 가족’을 임진각 부근으로 데려가 근사한 식사를 대접한다. 이때 텔레비전 뉴스에는 백남기 농민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재용은 “조계사 촬영을 갔는데 마침 한상균 위원장이 그곳에 있었고, 촬영 당시 가장 뜨거운 이슈 역시 백남기 농민의 부상이었다”며 “일부러 찍은 건 아니지만, 영화는 드라마를 넘어 당대 역사의 기록이라는 생각으로 화면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에는 이재용이 평소 자주 하는 말이 소영의 대사를 통해 나온다. 돈 때문에 노인을 살해한 범인을 좇고 있다는 뉴스에 사람들이 혀를 찬다. 그러자 소영은 혼잣말처럼 말한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거죽만 보고 떠들어대는 것뿐이야. 아무도 속은 모르는 거거든.” 난폭운전을 하는 운전자는 지금 아이가 아플지도 모른다. 진상을 떠는 아줌마는 방금 남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죽여주는 여자>가 그리는 세상은 음울하고 쓸쓸하지만, 이재용은 어떻게든 그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내자고 제안한다. 마치 소수자들이 모여사는 이태원의 낡은 집 마당에 늘 햇빛이 드는 것처럼. “비루하고 남루해도 살아야죠. 유머도 온기도 없다면 너무 힘들잖아요. 세상을 일부러 비참하게 그리고 싶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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