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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중독자의 삶, <제로 다크 서티>


(약스포)


<제로 다크 서티>의 티져 포스터 


거친 비유가 되겠지만, <허트 로커>가 <추격자>라면 <제로 다크 서티>는 <황해>다. 전작이 특정한 정서의 핵심을 단순한 줄거리 안에 밀도 있게 담아냈다면, 이어진 작품은 확장된 서사 구조 안에 그 정서를 고르게 녹였다. <추격자>가 서울 서북부 단독 주택가의 밤을 맴돈다면, <황해>는 중국에서 시작해 한반도 서해안을 거쳐 반도 남부를 종으로 가로지른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의 도심과 사막, 미군 기지를 오가는데, <제로 다크 서티>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거리, CIA 비밀기지, 병영, 미국의 워싱턴DC, 버지니아의 CIA 본부 등을 포괄한다. 전작의 성공에 고무돼 스케일을 턱없이 키웠다가 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정한 사이즈에 맞는 이야기, 정서가 있는데, 그 사이즈를 키워버리면 이야기는 흐물흐물, 정서는 묽어진다. 그러나 두 영화의 감독인 나홍진과 캐서린 비글로우는 모두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의 뼈대를 강화하고, 정서의 밀도를 높였다. 그래서 나는 <허트 로커>와 <추격자>보다 <제로 다크 서티>와 <황해>가 좋다. 


미국에서 <제로 다크 서티>의 고문 장면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비글로우는 고문을 반대하지만 영화는 특정 입장에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CIA 요원들이 피의자에게 고문을 해서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내고 그래서 결국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는 과정에 이른다는 줄거리를 관객에게 따르게 한다. 그런 면에서는 고문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난 이 영화의 이런저런 정치적 입장보다도 다른 부분이 더 눈에 띄었다. 바로 '일의 세계'다. '갑툭튀'해 명배우 반열에 들어선 제시카 차스테인이 연기한 CIA 요원 마야는 정말 일을 열심히 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CIA에 입사해 12년간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일했다.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앉은 CIA 국장이 빈 라덴 잡는 거 말고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냐고 묻자, 마야는 "없다"고 답한다. 그녀의 커리어는 오직 빈 라덴 사살에 맞추어져 있었다. 



24시간 빈 라덴 생각


영화의 첫 장면은 고문이다. 마야는 현장 발령을 받자마자 고문 현장을 참관한다. 맞고 질식되고 모욕당하던 피의자의 모습을 마야는 좀처럼 직시하지 못한다. 고개를 돌리려는 마음, 봐야한다는 마음이 반반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마야는 고문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낸다. 오히려 미국의 표현대로라면 주요 피의자에 대해 이 '강화된 심문법'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즐기는 듯 보인다. 책상 건너편에 앉은 피의자에게 질문을 던지다가 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앞에 앉은 건장한 군인을 툭 쳐 피의자에게 주먹을 날리게 하는 장면은 차스테인의 기가 막힌 연기 때문에 더욱 섬찟하다. 고문이 옳지 않다는, 인권에 대한 천부적인 감성을 마야는 이겨낸다. 일을 잘하기 위해. 


왜 그렇게 일을 잘하려 하는가. 마야는 조국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미국을 공격한 녀석들을 잡아내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놈들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 때문인가. 물론 애국심도, 복수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선 그 어느 것도 주요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마야에게 빈 라덴을 잡기 위한 그 모든 합법적, 탈법적 수단은 모두 일의 완성을 위해서다. 그래서 그 일의 완성을 가로막는 것에는 격렬히 저항한다. 그것이 직속상관이라 해도. 


난 마야를 보면서 뜬금없이 <베를린> 속 한석규가 떠올랐다. 극중 국정원 직원인 그는 "이 일을 왜 하냐"고 묻는 북한 요원 하정우에게 "일이니까 하지. 일에 이유가 있냐"고 답한다. 한석규에게 '빨갱이' 잡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야에게 빈 라덴을 추격하는 일에도 이유가 없다. 그저 일이니까 한다. 


아마 한석규나 마야가 한국이나 미국이 아닌 반대 진영에 태어났다면, 지금과 똑같은 수준에서 열심히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정보 요원이 되지 않았을까. 한석규나 마야가 정보요원이 되는 것은, 그들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성격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였다면 아이히만을 관찰했을 때처럼, 이들에게서 '무사유성'을 읽어낼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인류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따지지 않은 채, 그저 유능하고 성실한 관료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던 아이히만. 그런 모습이 마야 혹은 <베를린> 속 한석규에게 엿보이는 거다. 



저 뒤의 국기가 인공기였다 해도 별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럼에도 나는 <제로 다크 서티>가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딘지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지독한 프로페셔널의 세계는 분명 매혹적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마야를 프로페셔널이라고 말하는 건 옳지 않을지 모른다. 그녀는 일의 완성을 위해 조직의 안정성을 해치길 주저하지 않기 떄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프로페셔널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마야를 '일중독자' 정도로 규정할 수도 있겠다. 


영화 종반부, 마야는 바디백에 담겨온 빈 라덴의 얼굴을 확인한 뒤, 드넓은 공군 수송기에 혼자 오른다. 조종사는 비행기를 혼자 차지한 것을 보니 중요한 사람인 것 같다고 인사를 하고 어디로 갈거냐고 묻는다. 마야는 망설이다가 대답하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그대로 끝난다. 알콜중독자에게 술이 떨어진 것처럼, 일중독자에게 일이 떨어졌으니 통곡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게 <제로 다크 서티>는 일의 기쁨과 허망함을 동시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