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젊은이가 거친 시대와 대결해 패하고 절망하고 타락하는 이야기는 숱하다. 난 영화 <박하사탕>부터 떠오른다. 그러나 난 한국에서 만든 영화 <박하사탕>보다 스페인에서 나온 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길찾기)에 더 공감했다. 왜 그랬을까. 


이 만화에 대해 덧붙일 말은 많지 많다. 작가가 자기 아버지의 일생을 사실적으로 옮긴 이 만화는 그 자체로 완결적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줄거리, 아니 주인공 안토니오의 삶을 간략하게 옮기는 것만으로도 이 만화에 대한 좋은 소개가 되리라 생각한다. 



안토니오는 2001년 5월 4일 90세의 나이로 양로원에서 자살했다. 동료와 복지사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건물 꼭대기로 올랐다. 안토니오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장면에서 만화는 안토니오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그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탐욕스럽고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아이가 한 마디라도 말대꾸를 하면 바로 싸대기를 날리는 경우가 잦았다. 궁핍한 환경이 그의 마음에서 여유를 앗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형제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 아버지의 얼마 안되는 땅을 물려받는데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안토니오는 달랐다. 그는 도시로 나가고 싶었고, 자동차를 몰고 싶었다. 함께 도시와 자동차의 꿈을 꾸던 친구가 어이없는 사고로 숨을 거둔 뒤, 안토니오는 그 길로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930년대 스페인의 도시는 혼돈이었다. 일자리는 없었고, 시민들의 마음은 온갖 사상들로 요동쳤다. 노동자들의 공화국이 선포됐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나키스트, 군부가 각기 봉기를 꿈꿨다. 안토니오는 프랑코의 군대에 징집돼 전선으로 떠났다. 부대의 사정을 면밀히 살핀 그는 탈영한 뒤 공화파에 합류했다. 안토니오는 평화를 사랑했지만, 총을 들수밖에 없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그는 자율적인, 다른 말로 하면 기강이 해이한 공화파 의용군에서 운전병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과 싸우기 위해선 '진짜 군인'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련의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용군은 정식 부대로 재편됐다. 혁명은 끝났고 공동체는 무너졌다. 모든 노력은 싸워 이기는데만 집중됐다. 


그러나 전세는 프랑코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스물아홉의 안토니오는 청춘은 지났고 인생은 패배했다고 느꼈다. 그는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민주주의 국가 프랑스는 파시스트에게 쫓겨난 스페인 난민에게 제대로된 음식도 숙소도 제공하지 않았다. 스페인으로 돌아가거나 프랑스 외인부대에 합류하는 길을 권했다. 둘 다 거부한 이들은 농촌 노동에 동원됐다. 안토니오도 그랬다. 


이러지러 떠돌다가 어느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안토니오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바깥 세상의 전쟁 따위는 잊고 마음 좋은 농부들과 어울려 일하고 먹고 섹스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 경찰은 이 떠돌이 스페인 사람을 체포해 독일군에게 넘겼다. 나치의 수용소에 갇혀있다 연합군의 폭격 와중에 탈출한 안토니오는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그러나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전쟁을 치른 안토니오에게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장난처럼 보였다. 


장난이거나 말거나, 전쟁은 끝났다. 평화가 찾아왔지만 여전히 일자리는 없었다. 안토니오는 함께 반파시스트 활동을 했던 지인이 하는 '사업'에 뛰어든다. 그것은 미군 군수품을 빼돌려 비싼값에 파는 일이었다. 돈을 벌었지만 안토니오는 회의를 느꼈다. 동업자의 부도덕성에도 치를 떨던 중이었다. 안토니오는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무릎을 꿇기로 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시절'을 지우기로 했다. 안토니오는 파시스트가 집권중인 조국으로 돌아갔다. 


생각을 지우고, 입을 다물면 살만한 곳이었다. 안토니오는 한 여성과 결혼했다. 생기발랄한 프랑스 여인과는 다른, 보수적이고 지루한 사람이었다. 결혼은 안토니오에게 죽음과 같았다. 자존심, 사상을 매장시키는 일이었지만,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안토니오는 시체처럼 살기로 했다. 


아내는 난산 끝에 아들을 낳았다. 이후 아내는 더욱 보수적이고 독실한 기독교도가 됐다. 안토니오는 일하고 있던 과자공장 사장 부인의 계략에 돔창해 사장을 몰락시킨 뒤 한몫을 챙긴다. 안토니오는 적당히 돈을 벌고, 외도를 하고, 아이를 키우고, 사기를 당해 파산했다. 안토니오는 아내와 헤어져 스스로 양로원으로 걸어들어갔다. 


안토니오는 그곳에서 15년을 지냈다. 재미있는 친구들도 만났지만 대체로 우울한 날들이었다. 특히 절친했던 룸메이트가 죽은 뒤로는 고통과 환각이 번갈아 찾아왔다. 안토니오는 비참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아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안토니오는 결국 스스로 그 일을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