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을은 독서, 수확, 단풍의 계절이 아닌 야구의 계절이다. 운이 좋게도 내가 좋아하는 한국의 프로야구팀은 몇 년 째 계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야구보는 즐거움을 더했고, 운이 나쁘게도 그 팀은 몇 년 째 계속 같은 팀에게 져 우승을 하지 못했다. 2007년 야구 시즌이 끝나고 쓴 '영화는 묻는다' 칼럼을 옮겨놓는다. 닉 혼비의 원작 <피버 피치>도 읽었고, 패럴리 형제의 영화도 봤다. 둘 다 미덕이 있지만, 아무래도 내겐 축구보다 야구다. (패럴리 형제는 요즘 뭐하나.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좀 뜸하다. Imdb 찾아보니 후반작업중인 영화가 있긴 하던데....)





야구가 좋습니까, 애인이 좋습니까.

한국과 미국에서 야구 시즌이 같은 날 끝났습니다. 한국에선 제가 응원하는 팀이 졌고, 미국에선 이겼습니다. 전 야성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축구보다는 이성적이고 통계 의존적인 야구를 좋아합니다.

야구든 다른 스포츠든, 어느 팀을 응원한다는 건 패배에 익숙해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리그에서든 우승은 단 한 팀뿐이기 때문이죠. 박민규의 장편 소설 ‘삼미 슈퍼스타스의 마지막 팬클럽’은 아예 지금은 사라진 만년 꼴찌 야구팀을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는 전사로 승격시킵니다.

패럴리 형제 감독의 ‘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야구 얘기입니다. 한때 악랄한 ‘화장실 유머’로 악명을 높였으나 최근 부쩍 유순해진 패럴리 형제가 내놓은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영국 작가 닉 혼비의 소설 ‘피버 피치’가 원작입니다. 그리 잘나거나 멋질 것 없는 현대 30대 남성의 초상을 곧잘 그려내는 이 작가는 ‘피버 피치’에서 북 런던 연고의 축구팀 아스널에 영혼을 팔아버린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는 당연히 팀을 바꿨지요. 바로 이번 2007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보스턴 레드 삭스입니다.

‘날 미치게 하는 남자’에는 수입이 좀 적은 것을 빼면 나무랄 데 없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온화하고 유머 감각 있고 귀엽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23년간 한결같이 마음을 준 다른 대상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 얘기죠.

정말 이 남자는 야구, 아니 레드 삭스에 미쳤습니다. 삶의 주기는 레드 삭스 경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매년 봄 레드 삭스의 스프링 캠프에 따라가면서 한 해를 시작합니다. 시즌이 시작되면 매일 저녁 유서 깊은 보스턴 펜웨이 파크를 찾는 건 먹고 자듯 당연한 일과입니다. 역시 레드 삭스 팬이셨던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내야쪽의 목 좋은 지정석을 유산으로 물려주셨습니다. 야구 시즌이면 지정석에는 매년 봐서 익숙해진 얼굴들이 모이고, 주인공은 이들을 ‘가족’이라 부릅니다. 프러포즈를 할 것 같이 진지한 표정을 지어 여자를 잔뜩 긴장케 하더니 건네는 말이 가관입니다. “나랑 레드 삭스 개막전에 가줄래?”
 
1920년 팀의 간판 스타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팔아버린 레드 삭스는 이른바 ‘밤비노의 저주’에 시달립니다. 2003년까지 레드 삭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며 우승 문턱에서 주저 앉는 일을 반복합니다. 라이벌 양키스가 최강팀으로 군림하고 있던 사이죠. 남자는 레드 삭스에 모든 걸 바쳤지만, 레드 삭스는 뭘 줬습니까. 또 한 번의 실수로 승리를 날려버리고, 주인공을 비롯한 많은 팬을 자학과 패배주의에 빠뜨린 것밖에는 없습니다.

상처 받지 않고 매번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선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강팀을 응원하는 겁니다. 이번 코리안 시리즈 동안에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괜히 혼자 열불내지 말고 이기는 팀을 응원하라”고 놀리듯 유혹하더군요. 그러나 천만에요. 아내는 바꿔도 응원하는 야구팀은 못바꾸죠.

대체 뭘까요. 이 이상한 고집 혹은 열정은.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도 27년이 됐습니다. 전 그동안 한 팀을 응원했고, 제가 그 팀에 바쳤던 응원의 마음은 제 일부가 됐습니다. 이 팀은 지금까지 단 3번밖에 우승하지 못했지만, 우승하지 못한 다음 시즌에도 전 여전히 같은 팀을 응원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는 바뀌고, 지지하는 대선 후보는 더 쉽게 바뀔 수 있지만, 응원하는 야구팀은 아닙니다.

몇 달 전 ‘푸른 눈의 평양 시민’ 등 이른바 ‘북한 3부작’을 내놓은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대니얼 고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당신의 정치 색깔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더군요. 고든 감독은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내 정치 색깔은 블루 앤드 화이트 스트라이프다!” 이 색깔은 그가 응원하는 쉐필드 축구팀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숭고하게 맹목적인 애정을 바칠 대상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그가 내게 아무런 보답을 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죠. 전 올해도 저의 기대를 저버린 팀을 위해 내년 봄을 기다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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