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읽지 않은 스티븐 킹의 소설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꽤 읽었는데도 아직 남아있다. 언젠가 영화로도 제작된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추석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역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가정폭력 문제를 이보다 더 잘 쓰기가 쉬울까. 이른바 '순수문학'에선 가정폭력에 고통받는 여성이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에선 복수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현실에선 전자의 경우가 많겠지만, 우린 장르소설 속에서라도 복수를 꿈꾼다. 


영화화된 <돌로레스 클레이본>. 캐시 베이츠가 <미저리>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 원작 영화에 출연했다. 



소설은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안주인 베라를 죽인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온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1인칭 진술 형식이다. 돌로레스는 자신은 베라를 죽이지 않았지만, 사실 수십년 전 남편을 죽였다고 털어놓는다. 남편은 개차반이었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 돌로레스가 참지 못해 대항하자, 이번엔 어린 딸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돌로레스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죽이기로 한다. 남편 살해의 모티브는 베라가 제공했다. 베라는 심술 궃고 까탈스러운 마나님인다. 베라와 돌로레스는 서로를 싫어하는 듯 보인다. 침대에 누워 거동을 못하는 말년의 베라는 일부러 똥을 싸 돌로레스를 골탕먹인다. 돌로레스 역시 베라를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친다. 그러면서도 둘은 은근하고 묘한 연대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제 너무 흔히 사용되는 말 '애증'이다. 소설의 핵심은 베라가 돌로레스에게 건네는 아래와 같은 충고다.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사건이 한 판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이 소설의 묘미가 있다. 베라와 돌로레스는 모두 범행 후의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이 죄책감은 스티븐 킹 식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로 표현됐다. 끔찍하게 썩은 시체가 살아나 산 자에게 돌아오는 설정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에서 종종 나온다. 살아남기 위해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됐지만, 이 역시 일정 수준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티븐 킹의 전언이다. 영원히 발 뻗고 편히 자는 죄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