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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배우를 말한다

배우가 하면 한다. <페이스메이커>의 김명민

/강윤중 기자

‘메소드 연기’란 극중 인물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연기 방법을 말한다. 한국의 수많은 배우들이 메소드 연기를 추종하지만, 김명민(39)만큼 이 방법론을 철저하게, 심지어 고지식하게 적용하는 배우도 드물 듯하다.

19일 개봉하는 영화 <페이스메이커>에서 김명민은 한물간 마라톤 선수 주만호로 등장한다. 친구가 운영하는 치킨집에서 배달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다시 한번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는다. 주만호의 쓰임새는 젊은 금메달 유망주를 위한 ‘페이스메이커’.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하는 젊은 선수를 위해 30㎞ 지점까지 안정적으로 속도감 있게 뛴 뒤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다. 평생 자신을 위해선 뛰어본 적이 없는 주만호는 다시 한번 페이스메이커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가족, 대표팀 동료의 시선은 탐탁치 않다.

5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그에게 몸상태부터 물었다. 루게릭병 환자 역을 하겠다며 20㎏ 감량을 한 적이 있는 그는 어느새 ‘자기 혹사의 아이콘’처럼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명민은 명랑했다.

“‘혹사’라는 표현은 ‘왜 불필요한 고생을 하냐’는 말처럼 들려요. ‘왜 힘든 역할만 하냐’는 지인들의 말도 많이 듣고요. 아니에요. 힘든 역할은 없어요. 캐릭터는 배우가 만듭니다. 배우가 하면 하는 거예요.”

"나 힘들어"라고 얼굴에 쓴 김명민, 힘든 연기가 아니라 진짜 힘든듯. 그러나 18년 연하 여성과 함께라면 다른 표정의 김명민.

원래 달리기를 좋아해 2000년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경험도 있는 김명민이다. 그러나 영화를 찍다가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친 이후로는 장시간 걷거나 달릴 수 없었다. 그래도 김명민은 <페이스메이커>를 위해 “마라토너가 되려고 했다”고 말했다. “내가 마라토너처럼 뛰지 않으면 주만호가 내뱉은 말은 다 거짓말로 들리지 않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촬영 두 달여 전부터 실제 마라톤 선수들과 1주에 3~4회씩 훈련했다. 하루 20~30㎞는 뛰었다. 자연스럽게 상체가 마르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굵어졌다. 100m를 17초에 주파하는 선수들의 보조에 맞추느라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달리기만큼 어려운 것이 장면과 장면의 연결이었다. 촬영 중간 세팅 시간에 감정의 흐름을 유지하는 건 모든 배우에게 어려운 일이지만, 마라토너 역할은 감정 뿐 아니라 육체의 상태까지 조절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난제였다. 아침 촬영이 있으면 새벽 5시30분부터 현장에 나와 뛰었다. 20㎞ 혹은 30㎞ 지점에 도달한 마라토너의 얼굴과 근육을 미리 만들어놓기 위해서였다. 중간에 식사 시간이라도 끼면 그저 굶어야 했다. 김명민은 “리얼리티는 배우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몸이 아프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듯이, 역에 몰입한 배우는 예민해진다. 촬영장에서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신경질을 부리는 배우들에 대한 소문이 횡행하는 이유다. 김명민도 마찬가지다. 그는 “예민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힘든 장면이 있을 때는 민폐 안끼치려고 촬영장에서 최대한 혼자 있으려고 한다”고 전했다. 하루치의 촬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좀처럼 말을 건네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김명민은 “(말 안거는게) 내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명민은 왜 이토록 힘든 역할을 맡았을까. 그는 소개팅의 비유를 들었다. 이성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결혼하자고 말해버렸다. 다음 번에 만나 따져보니 여자는 ‘돌싱’이었고 아이까지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결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좋은 시나리오를 읽고 감동받아 역을 맡겠다고 덜컥 말해버렸다. 그 역할을 소화하기가 얼마나 힘들지 계산하는건 그 다음 문제다.

<페이스메이커>에는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를 논하는 대사가 있다. 누군가는 돈이나 명예를 위해 잘하는 것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좋아하는 것을 한다. 김명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지금 좋아하는 걸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잘하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김명민이 늘 기도하는 주제가 있다. “제 자신을 알게 해달라. 교만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에 비해 자신에 대한 평가는 두 단계 정도 박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마라톤에 비유하면 이제 반 정도 왔다”고 말했다. 

왠지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낯선 김명민/ 강윤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