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도 그렇지만 대통령이 악당인 영화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늘은 대담한 상상을 하고 싶다. 한국영화에서 대통령이 악당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풍경 속에서 경제권력의 정점인 재벌은 이미 강력한 악의 축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베테랑>은 그 대표적 사례다. <베테랑>에 등장하는 젊은 재벌 2세 조태오는 천하의 악당이다. 마약을 하고, 술자리에서 기괴한 풍경을 연출하고, 체불 임금을 달라는 노동자를 두드려 패게 하고, 살인을 사주하고, 범죄 증거를 인멸한다. 전국 1300만명의 관객이 정의로운 형사에게 응징당하는 젊은 재벌을 보며 환호했다. 

최근 개봉한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에서도 만악의 끝에는 재벌이 있다. 이른바 ‘영남제분 여대생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거대 기업의 실질적 지배자인 ‘여사님’을 악당으로 등장시킨다. 우아한 자태의 여사님은 지역 사회를 위한 자선활동에 열심이지만, 속은 ‘없는 것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여사님은 자신의 수족들에게 각종 범죄를 지시하고, 간혹 범행에 직접 가담하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 '특별수사'


대중문화 속 재벌 이미지가 처음부터 나빴던 건 아니다. 한국의 주말 드라마 속 재벌은 부도덕하거나 비인간적일지언정, 극악한 범죄자는 아니었다. 그들의 악덕이라고는 재벌 2세와 평범한 여성의 사랑을 방해하거나, 그룹 경영권을 위해 형제끼리 모략을 꾸미는 정도였다. 때로 재벌 2세는 아버지의 기업에서 일했는데, ‘실장님’이라 불리곤 했던 그들은 가난하지만 순박한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현빈이 이탈리아산 명품 트레이닝복을 입은 백화점 사장으로 나온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불과 5년 전 작품이다. 


2016년의 드라마에서 재벌 2세를 멋진 왕자처럼 묘사한다면, 그런 시대착오적인 드라마의 시청률은 바닥을 길 것이다. 멜로드라마 속 연모의 대상이었던 재벌 2세가 어쩌다 범죄영화 속 악당으로 전락했을까. 단순하다. 대중이 이런 설정을 즐기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제인 대통령에 대한 시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별별 이야기를 다 만드는 미국 사례부터 보자. 마이클 무어는 다큐멘터리 <화씨 9/11>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도 유치원 수업을 참관한 채 아무 일도 안 하고 앉아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보여주며 조롱했다. <킹스맨>에선 버락 오바마를 연상시키는 미국 대통령이 괴짜 IT 거물의 대학살 계획에 동조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 <24>에는 공포 정치를 위해 테러를 묵인하는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례는 많지 않다. 한국영화에서는 더욱 드물다. <그때 그 사람들>은 10·26 사건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그렸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로부터 송사를 당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대단한 악당이라기보다는 주책스러운 노인으로 그려졌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에는 세 명의 대통령이 나오는데, 인간적인 결점은 있을지언정 역시 악당은 아니다. 

대통령을 악당으로 그리면 큰일이 나는 걸까. 아마 그런 영화가 나오면 ‘국격 훼손’ 운운하는 사람부터 있을 것 같다. <그때 그 사람들>이 개봉했을 때도 보수진영은 격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유권자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일 뿐이다. 국가 이미지의 유일한 체현도, ‘반인반신’도 아니다. 그래도 대통령을 못나게 그리면 국격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황우석 사건’을 취재한 <PD수첩> 제작진의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그들은 ‘진실’과 ‘국익’ 중 전자를 택했다. 만일 ‘예술’과 ‘국격’ 중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예술가가 있다면, 선택지는 분명하다. 관건은 두 가지다. 대통령이 악당인 영화에 수십억원의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영화를 관객이 박수치며 즐길 것인가. 요즘 같으면 후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