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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읽고+출판 담당 기간 만료 찾아보니 2월쯤부터 출판 담당 2진을 한 것 같다. 회사에 조직 개편이 있으면서 이번주를 마지막으로 출판 담당이 끝났다. 11개월 정도 출판 담당을 한 셈이다. 1진 선배에게 오는 책의 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화요일이면 책상 가득 쌓이는 책 봉투를 뜯어 갓 배달된 책들을 훑어보곤 했다. 대단한 애서가나 장서가, 독서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처지로서는 즐거웠던 11개월이었다. 영화가 그렇듯, 오래도록 생각이 나는 좋은 책은 드문 것 같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라 읽은 책이 만족감을 줬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앞으로는 다시 독자로 돌아간다. 화요일부터 목요일 오전까지, 허겁지겁 활자들을 주워 삼키는 일도 없겠다. 이 블로그의 '서재' 카테고리 업데이트도 .. 더보기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출판계에선 이 책에 실린 공지영 작가의 사진을 두고 화제가 일고 있다고 한다. 왜 이런 사진을 찍었는지는 공 작가와 찍어준 사람, 출판사 편집자만 알 일이다. 아무튼 즐거움을 선사했으니 다행인 사진. 제목을 보고 두메산골의 대안학교 이야기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요절복통 시트콤의 대본에 가깝다. 시트콤 주연은 버들치 시인, 낙장불입 시인과 그의 아내 고알피엠 여사, 저자인 꽁지 작가 등이고, 조연은 강남좌파, 최 도사, 스발녀, 가수 등불, 수경·연관·도법 스님 등이다. 그런데 이 시트콤엔 눈시울 시큰해지는 대목이 종종 박혀 있다. 도시에서 쫓겨나 혹은 벗어나, 스스로 가난해지고 싶어, 뭇 생명을 사랑해,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하기 싫어 지리산을 등에 지고 섬진강을 내다보며 옹기종.. 더보기
연애대행업의 시대 <시라노 연애조작단>+<김종욱 찾기> 1990년대에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다들 제라르 드파르듀가 나온 를 본 것 같다. 그 느낌을 되살려 영화를 만들었는데 여전히 흥행한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은 오랜만에 흥행한 로맨틱 코미디다. 스릴러도 좋지만 로맨틱 코미디도 좀 나왔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나오고 있다. 내년 이맘때쯤엔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가 지겨워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래 글의 결론은 아래 사진처럼 앉아있는 여자를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것! 시라노는 필요합니까. 첫사랑 찾기 사무소를 열어야 했습니까. 과 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일종의 ‘연애 대행업’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가을 개봉해 흥행에도 성공한 은 19세기 프랑스 희곡에 느슨하게 기반을 두었습니다. 못생긴 외.. 더보기
좋은 의미의 문예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에 미학적인 전환점은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의 문예 영화다. 보고 나면 미학적 충격보다는 교양이 쌓이는 종류의 영화. 숙련된 배우와 안정된 연출이 어울렸다. 원작 소설의 번역자가 의외의 분이라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나저나 톨스토이 읽는다고 말만하고 아직 실천 안하고 있다. 읽으면 일단 보다는 부터. 지난달 20일은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세상을 뜬 지 100년째 된 날이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톨스토이지만, 러시아에선 이상하리만치 아무 일 없이 톨스토이 100주기가 넘어갔다고 한다. 방송사에선 특집방송을 방영하지 않았고, 국립박물관에는 기념전이 없었다. 1999년 알렉산데르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푸슈킨의 날’을 지정할 만.. 더보기
사라오름을 다녀오다 얼마전 사진으로 먼저 올린 제주도 여행기. 사라오름을 중점으로 썼다. 처음엔 '사라오름 등정기'라고 제목을 붙여 올렸다가 민망해서 얼른 '사라오름 다녀오다'로 바꾸어 올렸다. 날씨가 조울증이었다. 서귀포의 숙소를 나설 때는 화창하더니 성판악 휴게소 근방에 도달하자 먹구름이 끼었다. 게다가 몹시 추웠다. 결국 사라오름으로 가는 길은 겨울등반이 됐다. 뒷동산을 닮은 포근한 오름을 생각했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사라오름으로 가는 길은 지난달 1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제주도에는 360여개의 오름이 있지만 공개되지 않은 곳이 많다. 오름은 사토(沙土)라 밟으면 유실되기 쉽기 때문이다. 외지인들은 올레길을 많이 찾지만, 제주도민들은 오름을 오른다. 각 학교와 직장에 오름 동호회가 생겨나 경쟁적으로 오름을 오르.. 더보기
사이트 앤 사운드의 2010 베스트 영화 결산의 계절이다. 영국의 영화평론지 가 2010 베스트 영화 10편을 선정했다. 결과는 아래와 같다. 1. The Social Network (David Fincher) 2.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Apichatpong Weerasethakul) 3. Another Year (Mike Leigh) 4. Carlos (Olivier Assayas) 5. The Arbor (Clio Barnard) 6. Winter’s Bone (Debra Granik) 6. I Am Love (Luca Guadagnino) 8. The Autobiography of Nicolae Ceausescu (Andrei Ujica) 8. Film Socialisme (Jea.. 더보기
잔혹한 할아버지,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신작 는 올 칸영화제에서 봤다. 최근의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초현실적으로 풀어내는 영화를 잇달아 만들어왔는데, 대중이 좋아할리가 없다. 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야쿠자 영화다. 때문인지 칸 현지의 반응은 '폭탄'에 가까웠다. 그래도 난 이 영화를 즐겼다. 상업적인 장르 영화로만 본다면 악당끼리 싸우다가 다 죽는 얘기는 원래 재밌지 않은가. 가 경쟁 부문이 아니라 비경쟁 부문이었다면 현지의 평가도 조금은 더 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봉한 이 영화의 홍보사가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제목은 '견딜 수 없이 잔혹한 명장면 베스트3'다. 잔혹한데 어떻게 보면 좀 웃기기도 하다. 이런 장면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라이벌 조직을 함정에 빠뜨려 본의 아니게 자신들의 조직에 무례를 범하게 한.. 더보기
<김종욱 찾기>, 공유 인터뷰 만나서 얘기해보니 공유는 괜찮았다. (요즘 만난 배우는 다 괜찮은 것 같다) 대화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정연하게 말했다. 는.....뮤지컬은 보지 않았지만 영화보다 나을 것 같다. 영화의 만듦새보다는 배우의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현재로선 언론 반응보다는 관객 반응이 좋다고 한다. 임수정과의 케미스트리도 좋았다. 공유(31)는 ‘남자’다.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복근과 184㎝의 훤칠한 키는 금세 눈에 띈다. 로맨스 연기를 할 때는 여전히 “오글거린다”는 배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할 생각이 없다. 동년배 남자 배우들이 하나같이 액션이나 스릴러로 달려가 치고 받고 싸울 때, 공유는 여성 취향의 로맨틱 코미디를 택했다. 멀리 내다보고 조급해하지 않기. 그는 영리한.. 더보기
<사랑하고 싶은 시간> 일상의 토양에서 일탈의 나무는 자랍니다. 그 나무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탈리아 영화 (영어 제목 What more do I want)은 흔한 소재인 ‘불륜’을 다룹니다. 각자 가정이 있는 남성과 여성이 우연히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 사랑하기를 반복합니다. 이들이 맺은 육체와 감정의 끈은 매우 질깁니다. 여자의 삶은 안정적입니다. 직장은 번듯하고 남편은 자상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 한구석엔 그늘이 드리워 있습니다. 지나치게 평안한 삶 속에서 권태를 느끼는 걸까요. 누군가는 행복에 겨운 투정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삶은 힘겨워 보입니다. 두 명의 아이는 온 집구석을 어지르고, 육아와 가사에 지친 아내는 늘 돈이 부족하다며 짜증을 냅니다. 외식업체에서 일하는 남자가 일주일 가운데 유.. 더보기
영구가 돌아온다. <라스트 갓파더> "설마" 했는데, 진짜다. 심형래가 영구 캐릭터를 다시 꺼내들었다. 마피아 대부의 숨겨진 아들이 영구라는 설정이다. 영화 속 마피아 대부는 그 유명한 하비 케이틀이다. 애초엔 말론 브란도의 속 장면을 따온다는 계획도 있었는데 잘 진행이 안된 모양이다. 심형래는 새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한다. 오늘 홍보사에서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아이유, 신동엽, 컬투 등이 영구 분장을 하고 심형래에게 오마주를 보낸다고 한다. 왠지 때도 비슷한 컨셉의 예능 프로그램을 본 것 같다. 아, 그떄 심형래는 에 나와 영화계와 평단에서 박대받았다며 울기도 했지. 이번엔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가 보다 괜찮기를 기대해 본다. 솔직히 예고편 보고 좀 웃었다. 사진제공 KBS 예고편. 더보기
<이층의 악당> 리뷰 영화가 흥행하든 안하든, 사실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은 좀 잘 됐으면 좋겠다. 비록 인터뷰하고 싶었던 한석규를 만나진 못했지만(몇 건의 인터뷰 후, 바람같이 강원도로 갔다고 한다....), 아무튼 난 이 영화가 무척 재밌었기 떄문이다. 난 한석규야말로 과소평가된 배우라고 생각한다. 손재곤 감독이 빨리 다음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디 앨런은 현대 도시인들의 뒤틀린 심리를 빼어나게 포착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을 창조하는데 일가견이 있으며, 지적인 대사를 잘 쓰고, 배우들의 연기 지도에 능숙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걸 웃음이라는 커다란 도가니에 넣어 녹여낸다. 그의 영화는 ‘코미디의 이상형’에 근접한다. 손재곤 감독은 두 번째 장편만으로 한국 영화계가 맛보기 힘들었던 코미디의 경지에 올랐다... 더보기
11월, 제주. 11월 24, 25일.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도의 이런저런 관광지들에 갔다. 첫 날은 주최측이 제시한 코스대로, 둘째 날은 주최측의 제시안 또는 자유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난 자유 여행을 택해 오전엔 11월 초 열었다는 사라오름, 오후엔 한라수목원에 다녀왔다. 그 사이엔 (해당 점포 바리스타의 말에 따르면) 제주 3대 드립 커피 집 중 하나라는 '신비의 사랑'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산굼부리의 억새밭이다. 날씨가 을씨년스러웠다. 이날부터 서울도 추웠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불어 억새가 쉬지 않게 쉬쉬 소리를 냈다.  절물휴양림의 풍경. 춥지 않은 날 다시 와서 천천히 거닐고 싶은 곳이다. 5시간동안 걷는 코스도 있었다. 중간에 화장실도 없이. 폐목을 깎아 만든 조각상이 있다. 하늘엔 난데없는 까.. 더보기
처음부터 끝까지 스타. 장동건 장동건은, 좋은 사람 같았다. 아마도. 스타이면서 좋은 사람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한 비난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영화 고르는 취향이 좀 독특한 것 같기는 하지만. 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난 그 영화가 좋았다. 한국 관객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미국 관객이 좋아할 가능성이 조금은 더 클 것 같다. 한국의 영화배우들 중에서 장동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스타인 사람이 또 있을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도 없고, 이렇다 할 시련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최근엔 아름다운 배우자와 아이까지 얻었으니, 장동건은 왕조 없는 나라에서 왕자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화려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험담이 들릴 법도 한데, 장동건은 예외다. 에서 상대역을 맡은 케이트 보스워스.. 더보기
비틀스와 애플 난 비틀스가 끝내 디지털 음원을 팔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저런 기사의 표현대로 어떻게든 가질 사람은 다 가졌겠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팔지 않기를 바랐다.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냥 비틀스는 공식적으로는 엘피나 CD로만 남아있기를 바랐다. 2010년 11월 16일은 음악 산업에서 디지털이 아날로그에 최종승리를 선언한 날로 기억될 듯하다. 현지시간으로 이날부터 비틀스의 디지털 음원이 애플의 아이튠스를 통해 판매됐다고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애플이 판매하는 비틀스의 음원은 리마스터 작업을 한 13장의 스튜디오 음반과 편집 음반 , 히트곡 모음집 와 등이다. 더블 앨범은 19.99 달러, 1장짜리 앨범은 12.99 달러다. 개별 곡은 1.29달러로 이는 아이튠스에서 판매되는 노래 중 최고 가격이다. 비.. 더보기
어린이책 코멘트1 아이와 놀아줄게 별로 없다. 이래저래 몸을 써도 한계가 있고. 어쩌면 가장 쉬운게 책 읽어주기다. 그래서 예전엔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어린이책을 몇 권 집어들게 됐다. 그림이 중심인 책들이다 보니 의외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일본 작가의 은 내 마음에도 든다. 작은 남자 아이가 옷을 하나 둘씩 벗더니 강, 바다, 산으로 날아다니며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내용이다. 선 굵게 그린 그림이 호방하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나는 바다의 왕자다"같은 대목을 힘차게 읽어주면 아이가 꺄르르 웃는 경우까지 있다(고 아내가 일러줬다). 난 한국작가의 이 책도 마음에 드는데, 아이는 몇 페이지 읽어주면 마치 '닭살 돋아 못보겠다'는 표정으로(물론 내 추측) 도망가 버린다. 곰인형을 안은 작은 소녀가 여.. 더보기
스티븐 킹의 <죽음의 무도> 스티븐 킹은 소설도 재밌지만, 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있다"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도 읽어볼만 하다. 물론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책읽기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타사에 나온 리뷰를 보니 '번역이 거칠다'는 평도 있던데, 킹 특유의 미국식 유머와 구어체가 섞여 있어서 번역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부분을 죽이면 정갈하고 읽기 좋겠지만, 번역자는 원본의 느낌을 살리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 먼저 퀴즈. 다이아몬드부터 쓰레기까지, 온갖 종류의 공포영화를 봤으며 스스로도 무시무시한 공포를 창조해내는 작가 스티븐 킹이 두려움에 떨다가 관람을 포기한 영화가 단 한 편 있다. 킹은 이 영화를 같이 보던 아들에게 “저 빌어먹을 영화를 꺼!”라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더보기
고다르 논란 고다르의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고 든 생각은 '치졸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태도에는 '니가 뭔데 영광스러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느냐'는 훈계가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어떤 민족, 인종의 사람을 구별없이 통째로 매도하는 인종주의는 지탄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일단 현재 나온 자료로만 봐서는 고다르가 반유대주의자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고다르는 현명하게도 혹은 무심하게도 최근의 논란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논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다. 게다가 반유대주의가 이토록 민감한 사안이라면, 9.11 이후 미국 내에서 거의 공식적으로 유포된 '반아랍주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난 칸영화제에서 고다르의 을 본 .. 더보기
연필, 샤프. 연필이 좋다.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책에 샤프로 줄을 긋다가 느꼈다. 샤프심은 종이와 마찰했다. 까끌까끌. 부드럽게 줄이 그어지지 않았다. 책이 마뜩치않게 내준 좁은 길 위로 샤프가 아슬아슬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책의 매끄러운 종이에는 상처가 나고, 샤프는 원치않는 경범죄를 저지른듯한 느낌. 연필로 줄을 그으면 부드럽다. 종이의 표면을 거침없이, 매끄럽게 흐른다. 연필을 깎은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가 더 좋다. 끝이 뭉툭해진 연필이 종이 위를 활강하듯 미끄러져 간다. 작은 연필깎기로 연필을 깎는다. 가늘고 곱게 갈린 연필 찌꺼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와 연필, 나와 나무, 나와 자연이 손을 마주치는 느낌이다. (며칠 뒤 이어서 적음) 오늘은 옆 자리의 선배가 파베르 카스텔 샤프를 자랑했.. 더보기
<소셜 네트워크> 혹은 누가 찌질이가 되길 원하는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인터넷 이용자들이 서로 알고 사귈 수 있게 도와주는 트위터, 페이스북, 싸이월드 등의 서비스로, 관계 맺기에 갈증을 느끼는 현대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사람을 안다는 건 얼마나 아는 걸까. 18일 개봉하는 의 언론시사회가 5일 열렸다. 이 영화는 10월 1일 미국에서 개봉해 곧바로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이미 제작비(약 5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감독은 , 의 데이비드 핀처, 각본은 텔레비전 시리즈 과 영화 의 아론 소킨이다. 1990년대 인더스트리얼 뮤직의 총아 트렌트 레즈너(나인 인치 네일스)가 영화음악을 맡아 들어본 적 없는 OST를 들려준다. SNS 자체보다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20.. 더보기
평생독서계획 클리프턴 페디먼과 존 S. 메이저의 을 읽다. 사실상 페디먼이 주요 저자이고, 메이저는 페디먼이 자신이 취약한 아시아쪽을 보강하기 위해 개정판에서 영입했다고 한다. 1960년에 초판이 나왔고, 번역본은 1997년의 수정 4판을 기초로 했다. 부터 치누아 아체베의 까지, 동서고금의 책 중 '평생독서' 리스트에 들어갈 133명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모았다. 각 작가당 원고지 12매 정도다. 시인이나 소설가 등 문인이 주를 이루지만, 마크르스와 엥겔스, 토마스 쿤, 공자, 헤로도토스, 혜능, 데카르트, 토크빌 등 학자나 종교인도 있다. 단점부터 간략히. 저자가 미국인이기 때문인지, 리스트가 영미권에 편향됐다. 물론 이러한 리스트가 모든 이를 만족시킬 리는 없지만, 그래도 조지 버나드 쇼, 유진 오닐은 있는데 .. 더보기
유모차 끌고 음악 페스티벌 가기 지산 밸리니, 펜타포트니, GMF니 하는 음악 페스티벌에 간 지 오래됐다. 공연을 보더라도 실내에서 앉아서 보는 것이 좋지, 서서 보기는 좀 힘들다. 물리적인 부분보다는 앉아서 듣는 종류의 음악에 요즘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GMF도 별로 갈 생각이 없었는데, 아내가 강력하게 가길 원했다. 동네에서 열리는데다가, 날씨도 좋고, 유모차를 끌고 다녀올 수도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음악 담당 선배에게 얘기했더니 "가는 대신 기사를 쓰라"는 거래를 역으로 제안해왔다. 아내와 선배 사이에 낀 나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음악 페스티벌에 다녀온다고? 세계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페스티벌인 1969년의 우드스탁을 아는 이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때 우드스탁은 .. 더보기
임순례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임순례 감독은 채식주의자다. 지난 부산영화제 때 어느 영화사가 회집에서 연 파티에서 만났는데, 그 많은 회를 두고 풀만 먹고 있었다. (물론 소주는 잘 마셨다.) 그가 채식주의자가 된 계기는 이렇다. 된장찌개인지 무엇인지를 끓여먹기 위해 검은 비닐봉지에 바지락을 한가득 사왔다. 그것을 마루에 두고 잠시 잊었는데, 한밤에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살아있는 바지락이 껍질을 열고닫으며 바스락대고 있었다. 차마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던 바지락이 살겠다고 꼬물락거리는 모양이라니. 그는 이후 바지락은 물론 고기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동물보호단체의 대표다. 해마다 복날이면 인사동에서 개를 먹지 말자는 시위를 벌이고, 절을 찾아가 죽어간 개들을 위한 위령제도 .. 더보기
'편의점 요리'에 대해 '편의점 평론가'라 불리는 채다인의 이 옆에 있다. 저자 약력을 보니 놀랍게도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물론 영문과 전공했다고 영어 잘하는건 아니지만)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요리를 모았다. 아마 어떤 사람에게 이 음식은 '요리'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이다. 먼저 '지구촌 일품요리' 챕터. '돈부리'라고 해놓고는 '냉동 돈가스' 사진이 있다. 돈가스를 튀긴 뒤 양파를 채썰어 넣고, 물, 간장, 맛술, 설탕 등의 소스 재료와 함께 2분간 끓인다. 양파가 투명해지면 끓인 소스에 돈가스를 넣고 달걀를 푼다. 달걀이 반숙이 되면 파를 채썰어 넣는다. 끝. 이 정도는 '요리'라고 봐줄 수도 있다. '세계의 면 요리'로 넘어가면 상황이 악화된다. '냉라면' 편에는 팔도 비빔면 .. 더보기
평범하기에더 정이 가는 남자 더스틴 호프만은 무력한 남자입니다. 그는 젊어서 무력했고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무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무력하기에, 스크린 속 호프만의 모습에 연민을 느낍니다. 영화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의 더스틴 호프만. (경향신문 자료사진) 올해로 73세인 호프만이 주연을 맡은 가 28일 개봉합니다. 극중 호프만의 처지는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뉴욕에 사는 광고음악 작곡가인 그는 런던에서 열리는 외동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딸은 신부 에스코트를 새아버지에게 맡기고 싶어합니다. 뉴욕의 회사에서는 ‘이제 그만 쉬라’며 퇴사를 종용합니다. 돌아갈 곳도, 남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그는 역시 삶의 무게에 짓눌린 여자를 만납니다. 호프만의 상대역은 영국 배우 에마 톰슨.. 더보기
고양이를 보고 나는 쓰네 늦은 퇴근길.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길고양이 시체를 보았다. 가죽만 벗겨놓은 듯 납작하게 엎드린 그 시체. 횡단보도의 무늬를 닮은 검고 흰 얼룩. 얼마나 많은 차들이 그 위를 지났을까. 첫번째 운전자는 타이어에 짓눌린 생명의 꿈틀거림을 느꼈을까. 두번째 운전자는 작고 곧은 척추가 우그러지는 소리를 들었을까. 세번째 운전자의 손에는 심장의 마지막 박동이 전해졌을까. 네번째 운전자는 작은 요철을 지났을까. 길고양이 영혼의 무게는 얼마일까. 그 무게는 인간의 영혼보다 가벼울까. 60억의 인간, 그 60억배수 생명체 영혼의 무게는 모두 얼마일까. 누구의 영혼은 다른 누구의 영혼보다 크고 무거울까. 나는 기억하고 생각하고 쓴다. 블로그를 통해 길고양이의 영혼을 불러세운다. 생명의 무게에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더보기
수애 ‘첫사랑 이미지’ 버리고 악역 해보세요 (난 수애가 한국에서 가장 멋있게 악한 여자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쟁자는 손예진이다.) ---- 수애는 좀 더 못되게 굴어야 합니다. ‘추억 속 첫사랑의 그녀’ 노릇일랑은 잊어버려 주세요. 지난주 개봉한 이 주말 동안 전국 35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수애로서는 2004년 으로 데뷔한 이래 처음 차지해본 박스오피스 1위라고 합니다. 고전적이고 단아한 외모 때문에 잠시 잊곤 하지만 수애는 동년배 여배우와 비교해서도 연기력이 빼어난 편입니다. 그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삶의 목표에 근접하는 역할을 곧잘 해냈습니다. 에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이드 노릇을 하는 탈북자, 에서는 말 한마디 없이 베트남전으로 향한 남편을 찾아나서는 아내, 에서는 외세·시아버지·남편 사이.. 더보기
추자현 추자현은 말을 잘 했다. 표현이 유려하다거나 말이 많다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정확하고 솔직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말을 넘어 그 속의 진심이 넘어다 보이는 경우가 있다. 에서도 추자현은 영리한 연기를 했다. 게다가 여배우로서의 중요한 능력, 즉 매력을 발산한다. 난 원래 그가 이전 작품(사생결단, 미인도, 실종)에서 보여준 것 같은 연기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한국에서 '열연'에 대한 칭찬은 과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난 그가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서 열연했다고 믿게 됐다. 추자현이 앞으로 좋은 작품을 선택해 오랫동안 스크린에 섰으면 한다. 추자현은 자신의 5번째 영화 에서 “깔깔대고 웃.. 더보기
시네마정동 영업종료에 부쳐 시네마정동, 스타식스 정동으로 더 익숙한 그 극장이 곧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윤성호 감독이 먼저 알고 있었다. 난 이 극장이 자리하고 있는 건물에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도 이 소식을 까맣게 몰랐다. 윤 감독은 자신의 트위터에 "그간 중앙시네마나 씨네코아가 문을 닫는다고 하면 조금 의무적인 자세로 아쉬움을 표현했는데, 개인적으로 정동은 다르다. 1년에 극장마실 한번 가던 정도인 내가 그 심야패키지에 끌려 개봉영화 보는 버릇을 들이게 한 곳"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내게 시네마정동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싶다며 극장 관계자 연락처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시네마정동은 윤 감독 뿐 아니라 내게도 추억이 있는 곳이다. 경향신문에 입사하기도 전인 2000년대 초반쯤, 난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의 여자친구와 시네.. 더보기
아이를 낳는 이유 이명박처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으스대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떤 글은 체험으로 인해 풍부해지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목적 의식을 갖고 아이를 낳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경험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아래와 같은 글은 아이가 없었다면 쓰지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아이가 없거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그만의 체험에 따른 글이 나올테니. 아무튼 이 글은 최근의 내 것 중 가장 반응이 좋았다. 다 진심이니까. 이 험하고 슬픈 세상에 새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까. 임신과 출산은 낭만, 감격보다는 당황, 고통의 연속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신보다는 짐승에 가까워집니다. 고상한 음악을 들으며 깔끔한 거실에서 살아가던 부모는 아기의 울음과 똥과 .. 더보기
김곡+김선=방독피 김선은 확신이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오만하다거나 경박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는 중간까지는 미심쩍다. 솔직히 미리 잡아둔 인터뷰를 어떻게 능수능란하게 취소시킬 수 있을까 궁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반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힘이 가득하다. 종반부에는 서울 거리에 엄청난 묵시록적 풍경이 나온다. 김선이 인용한 오시마 나기사의 말은 매우 멋지다. 전위라고 다 전위가 아니다. 미학의 전위에서 정치적 보수성을 드러내거나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고루한 형식에 담아내는 예술가가 부지기수다. 1978년생 일란성 쌍둥이 형제 김곡·김선은 현재 한국 영화의 최전위에 선 감독들이다. 미학과 정치 양 측면에서 모두 최전위라는 점에서 이들은 한국 독립영화계에서도 독특한 존재다. (2001), (2003) 등을 내놓으며 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