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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에 대해, '알리타: 배틀 엔젤'과 '킹덤'의 경우 ***스포일러 있음'알리타: 배틀 엔젤'은 지금보다 더 근사할 수 있었던 영화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크게 흠잡을데가 없다. 이미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은 가상 캐릭터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 재현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는 SF의 오랜 소재지만, '알리타'는 인간과 사이보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이질성을 극복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세상을 시각적, 감정적 이물감 없이 보여준다. 사이보그지만 또한 10대 소녀의 외모와 행동 방식을 가진 알리타는 10대 소년과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알리타가 심장을 꺼내 보여주며 사랑을 증명하려 하자 소년 휴고가 당황하는 장면은 인간과 기계가 교류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마주칠 '언캐니 밸리'를 재치있게 그려.. 더보기
50대 액션 스타, '폴라' 넷플릭스 영화 '폴라'를 보다. 이름이 낯선 스웨덴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가 연출했다.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쪽은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대신 U2,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리고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확 들어온다. '폴라'는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화려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전부). 던컨(매즈 미켈슨)은 50을 앞두고 은퇴 직전인 청부살인자다. 던컨은 은퇴와 함께 회사로부터 거액의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사장은 그 퇴직금이 너무 아까워 은퇴 사원들을 미리 죽이려 한다. 그러면 퇴직금을 아껴 회사 자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젊은 킬러들을 던컨에게 보낸다. 하지만 애송이들에게 쉽게 죽을 던컨이 아니다. 이러한 종.. 더보기
청소년이 볼 수 없는 청소년물, '아메리칸 반달리즘' ***스포일러 있음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반달리즘'(American Vandal) 시즌 1, 2를 봤다. 시즌 1은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있던 차량들에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로 남성 성기 낙서를 해놓은 사건을, 시즌 2는 고등학교 급식 레모네이드에 설사제를 넣거나 피냐타 안에 똥을 넣거나 하는 식의 '똥 테러'를 그린다. 두 명의 고등학생 프로듀서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해나가는 페이크 다큐 형식이다. 두 사건 모두 유력한 용의자가 드러났고, 해당 학생은 퇴학당한 상태다. 일단 부딪히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진 두 프로듀서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꼼꼼히 살핀 끝에, 진범으로 몰린 이가 진범이 아님을 밝혀 나간다. 범죄는 범죄인데 중범죄는 아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피의자로 연루된 사건이다. 범행도 심각하다기.. 더보기
히트 예감! '종이 동물원'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를 말할 때 당연히 떠올리는 사람은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 테드 창이다. 하지만 이제 떠올리는 사람을 바꿔야할지 모른다. '종이 동물원'(황금가지)의 켄 리우다.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불만이 좀 있었다. '이건 보르헤스가 7쪽 정도로 쓸 글을 50쪽으로 늘려놓은 것 아닌가?' 사변이나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선 삐걱대는 관절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켄 리우는 다르다.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그걸 능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때론 너무 능숙해 '반칙'이란 생각도 든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이 그런 느낌이다.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 어머니를 무시하고 멀리하다가, 뒤늦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이런 이야기를 .. 더보기
인터액티브 영화의 시작?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스포일러 있음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다섯 번째 시즌이 신기한 시도를 했다. 12월 28일 공개된 첫 에피소드 제목은 '밴더스내치'. 사실 '블랙 미러'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이긴 한데, '밴더스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이 신기하다. '밴더스내치'는 간단히 말해 인터액티브 영화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밴더스내치'가 인터액티브 영화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 가지 옵션 중 10초 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항상 선택할 자세를 취하라고 일러준다. 난 집에서 PS4로 넷플릭스를 보았기에, 이 기계에 딸린 듀얼쇼크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대배경은 1980년대 초반. 주인공 스테판은 '밴더스내치'.. 더보기
패러디와 통찰 사이, '생명창조자의 율법' 제임스 P 호건의 1983년작 SF '생명창조자의 율법'(폴라북스)을 읽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중세 지구 수준의 문명을 갖춘 로봇 생태계가 발견된다는 전제가 흥미롭다. 폰 노이만의 무한 자기복제기계 개념에 근거해 타이탄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번식한 기계 생태계를 묘사하는 프롤로그가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하기도 하다. 발달한 지구인과 그에 뒤쳐진 기계의 구도는 제국주의 서구와 피식민지 비서구 구도의 명확한 패러디다. 제국주의 정책을 편 서구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적,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듯, 지구인들 중에서도 '탈로이드'(타이탄의 기계 개체를 이렇게 부른다) 세계를 전적인 자원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있고 탈로이드를 독자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해야할 개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지동설이나 훗날의.. 더보기
마법 대신 가족 로맨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스포일러 있음'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는 대체적 평가대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그 스핀오프 작품 중에서도 못 만든 편에 속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133분은 그리 긴 상영시간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유독 길게 느껴진다. 영화가 이렇게 제작된데에는 짐작가는 이유는 있다. 워너브라더스는 '신비한 동물' 시리즈를 격년에 한 편 꼴로, 모두 5편 선보이겠다고 공언했다. 5편의 시리즈를 동력을 잃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선 서사가 유장하고 굴곡지게 이어지고, 캐릭터는 충분한 깊이를 갖출 준비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작진은 '신비한 동물' 2편인 이번 영화에서 그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2편은 1편처럼 신비한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그 특성을 현시해 관객의 시선을 모으지 않고, 이렇.. 더보기
문화혁명과 SF의 상상력 '삼체' ***스포일러 있음. SF 업데이트의 일환으로 중국 소설 '삼체'(류츠신, 삼체)를 읽다. 중국 SF로는 처음으로 2015년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읽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접한 '삼체'라는 게임 공간의 묘사가 그렇다. '삼체'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인데, 세 개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움직여 안정적인 기후기와 불안정한 기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게이머는 이 공간의 규칙을 파악해 가급적 문명을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주왕, 복희, 코페르니쿠스, 뉴턴,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 등(의 아이디를 쓰는 게이머)이 등장해 세계의 규칙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때마다 게임은 종.. 더보기
가장 이상한 도시들,'이중도시' 넷플릭스 영화로도 제작된 '서던 리치' 시리즈 1권 '소멸의 땅'을 읽다가 '뉴 위어드'라는 장르 이름을 알게 됐다. SF의 하위 장르라고 하는데, 그냥 '위어드'의 원조는 러브크래프트라고 한다. 그러니 '뉴 위어드' 분위기가 대략 짐작이 됐다. 호러 같다가 판타지 같다가 SF 요소도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같지만 읽다 보면 끌리는, 그런 이야기인 것으로 마음대로 생각했다. 내친 김에 '뉴 위어드'를 더 읽어보기로 했다. '서던 리치'의 제프 밴더미어와 함께 차이나 미에빌이 최근의 대표적 작가라고 한다. 그의 '이중도시'(아작)를 찾아 읽었다. 미에빌은 특이하게도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인류학을 공부했고, 런던정경대에서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다. 톨킨류의 권선징악적 판타지에 대한 혐오를 여러 차.. 더보기
'퍼스트맨'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스포일러 조금(그런데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간게 스포일러일까?)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을 보고 몇 가지. 1. '퍼스트맨'의 초반부 우주 유영 장면에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검고 광막한 우주 공간을 느리고 우아하게 유영하는 비행체의 모습은 모두 스탠리 큐브릭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소심하게 주장한다). 나른하고 아름다운 배경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큐브릭이 우주에서 트랜스 상태로 도달하는 방법은 관념이었지만, 셔젤은 철저히 물질이다. 큐브릭의 우주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한 끝에 제 머리 속의 관념 혹은 외계의 초인간적 존재를 만난다. 하지만 셔젤의 우주인들은 우주선의 예기치못한 사고로 인해 제자리에서 급회전을 하거나 엄청난 진동을 경험하면서 트랜.. 더보기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본 김에 내처 조너선 에임즈의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프시케의 숲)까지 읽었다. 소설이 나온 건 2013년인데 4년만에 영화화됐으니 상당히 빨리 진척된 셈이다. 영화가 89분으로 짧았는데, 소설 역시 152쪽으로 짧다. 분량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복잡한 미스터리를 감추어 두었거나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 일은 없다. 하드보일드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난다. 심지어 '이제 절정부로 가겠군' 하는 순간에 끝나버린다. 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구성인데, 실제 속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소설의 확장판이 2018년 나왔다고 하는데, 원판의 결말에서 더 나아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다른 부분은, -주인공 .. 더보기
비 오는 밤의 꿈같은 인생, '나, 제왕의 생애' 오래 전부터 제목을 들었던데다가 얼마전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읽은터라 비교해보려 손에 들었는데, 독재자 소설은 빼고 이 책만 언급해도 되겠다 싶었다. 중국 작가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는 오랜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긴 책이다. 조금 더 집중했다면 한 자리에서 350여쪽을 읽어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가상의 고대왕국 섭국이 배경이다. 왕이 승하한 뒤 여러 명의 왕자 중 열네살의 단백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장자 단문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 모두가 예상했던 터였기에, 단백의 왕위 계승은 본인조차 놀란 일이었다. 마음도, 자질도 준비되지 않은 단백은 서로 사이가 나쁜 할머니와 어머니의 수렴청정 아래 무기력한 제왕으로서의 나날을 보낸다. 어린 섭왕은 선왕의 후궁들의 혀를 자르거나, 충성스러웠던 패.. 더보기
트라우마와 킬러와 소녀,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포일러 있음'케빈에 대하여'(2011)는 근 10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무섭다. 1시간 52분이면 긴 상영시간도 아닌데, 그 시간 내내 온몸이 굳어 있었다. 나중에는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봐도 무서웠다. 이 영화에서 '케빈' 역을 맡은 에즈라 밀라는 이후 어디서 봐도 무서워하게 됐다. 아무리 멀쩡한 역을 연기해도 무섭다. (하긴 멀쩡한 역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하다) 기자회견이나 팬미팅에서 활짝 웃고 있어도 무섭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린 램지가 '케빈에 대하여' 이후 6년만에 내놓은 영화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돼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받았다. '케빈에 대하여'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여전히 온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다. 조(호아킨 피닉스)는 실종 혹은 납치된 사람을 .. 더보기
앞선 문명으로부터 뒤처진 문명에게,'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의 1954년작 '중력의 임무'는 하드SF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교과서'란 표현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학계 다수로부터 인정받은 주류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비관보다는 낙관에, 감성보다는 이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하다. 적도 지름 7만7000km, 극 지름 3만km의 찌그러진 팬케이크 모양 외계 행성 메스클린이 배경이다. 자전 속도가 매우 빨라, 지구 시간으로 18분이면 하루가 지난다. 메스클린이 지구와 가장 다른 점은 중력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다. 이 행성의 중력은 적도에서는 지구의 3배, 극지방에서는 지구의 700배에 달한다. 메스클린 행성의 엄청난 중력이 이 하드SF가 보여주는 트릭의 원천이다. 이 행성에는 납작한 애벌레 모양의 지적 생명.. 더보기
짓다만 성, '안시성' ***스포일러 있음. 추석 영화 중 '안시성'을 보았다. 관람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투 장면의 표현 수위가 '12세 관람가'에 맞춰졌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전투 장면에선 인체가 크게 훼손됐다. 피가 낭자하진 않았지만, 신체는 여러번 절단됐다. 오히려 '12세 관람가'가 다소 후하게 받은 등급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본의 방향성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 세계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영화가 민족주의 색채를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연개소문과의 갈등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공성전이나 백병전도 잘 연출됐다고 생각한다. 과시적이면서도 흔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병사들의 동선이나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연출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9.. 더보기
스와핑, 섹스봇, 신경개조, 감옥실험...'심장은 마지막 순간에' 마거릿 애트우드의 2015년작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원제 The Heart Goes Last, 위즈덤하우스)를 읽다. 전에 읽은 애트우드의 대표작 '눈먼 암살자'는 무언가 굉장히 복잡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소설이었는데,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속도가 났다. 읽으면서 뭔가 빠트린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경제 위기로 미국 사회가 '카드로 지은 집'처럼 붕괴한 근미래,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집도 직장도 없이 자동차에 의탁해 떠돌며 살아간다. 그런 부부가 흥미로운 광고를 접한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포지트론 프로젝트 광고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됐다. 사람들은 한 달은 감옥에서, 한 달은 주민으로 살아간다. 한 사람이 한 집을.. 더보기
인간관계의 총합 '검의 폭풍'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제3부인 '검의 폭풍'(A Storm of Swords)을 읽다. 과거에 번역이 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요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나오고 있다. 4부는 2019년, 5부는 2020년 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미드 제목인 '왕좌의 게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는 소설의 진도를 이미 앞지른 상태이며, 내년에 마지막 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다. 작가가 쓰지 않은 내용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마 드라마 제작진이 전개에 대해 작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쳤을 것이다. 나는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팬이기에 이번에 읽은 '검의 폭풍'의 내용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검의 폭풍'에는 드라마 시청자들.. 더보기
음악만 들어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봤다. 이 영화가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감독 교체(드니 빌뇌브->스테파노 솔리마)보다는 에밀리 블런트의 부재가 더 큰 이유라고 꼽고 싶다. 에밀리 블런트는 전편에서 멕시코 마약 조직 소탕을 위해 투입된 FBI 요원 케이트 역을 맡았다. 케이트는 FBI로는 베테랑일지언정,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는 신참이다. 카르텔은 잔인무도하기가 세상에 이를데 없다. 이 카르텔에 비하면 '대부'의 마피아는 신사라고 느껴질 정도. 잔인무도한 조직에 맞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점잖을리 없다. 작전의 책임자인 CIA 요원 맷(조쉬 브롤린)과 '컨설턴트'라고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역시 알고보면 잔인무도한 사람들이다. 알레.. 더보기
SF? 로맨스! '스타터스'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황금가지)를 읽다. SF라고 알고 읽었는데 사실은 로맨스다. 사실 '스타터스'가 SF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저 내가 잘못 알았을 뿐이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의 일환으로 나왔다. 그러니 'SF가 아니라 SF적 설정이 있는 로맨스였다'고 통탄해봐야 내 잘못이다. 미래 어느 시기, 태평양 양쪽 국가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 생물학 무기가 투하된다. 그 때문에 미국에는 '엔더스'라 불리는 노인들과 '스타터스'라 불리는 청소년, 어린이만 살아남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과학적 설명은 생략돼있다) 엔더스는 부유하고, 부모가 없는 스타터스는 가난하다. '스타터스'인 '나' 켈리는 큰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위험한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이.. 더보기
난삽하지만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한, '유령퇴장' 타계를 추모하는 혼자만의 의식으로 필립 로스의 2007년작 (문학동네)을 뒤늦게 읽다. 국내에는 2014년 출간됐는데, 언젠가 입수했다가 회사 책상 앞 책꽂이에 꽂아놓은 뒤 읽지 않고 두었다. 알다시피, 책은 한 번 읽을 시기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로스의 책을 몇 권 읽어나갔을 때 은 제 순서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난 로스의 책에 조금 지쳤고, 그렇게 을 방치했다. 그래도 책을 치워버리지는 않아서 몇 번 자리를 옮기면서도 줄곧 눈에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 사이 은 100년전부터 거기 있었던 정물처럼 놓여있었다. '나'는 70대의 유대계 미국 소설가 네이선 주커먼이다. 주커먼은 1974년 로스의 책에 처음 나온 뒤, 까지 모두 9번 등장했다. 등 로스의 대표작이 그 9편에 속한다.. 더보기
지속가능하지 않은 승리와 열정 '보리 vs 매켄로' 야구 영화 본 뒤 야구하고 싶은 적은 없다. 축구 영화 본 뒤 축구하고 싶은 적도 없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를 보고 테니스를 치고 싶어졌다. 파란 잔디가 깔린 윔블던 센터 코트를 부감으로 잡은 초반부부터 그런 생각이 든다. 파란 잔디, 하얀 유니폼, 두 코트를 빠르게 오가는 작고 노란 공... 관중들이 숨죽인 사이, 코트를 때리고 튕겨나가는 공 소리가 경쾌하다. 두 플레이어의 재빠른 발소리와 힘겨운 신음 소리. 나도 잔디 코트에 공을 튀겨보고 싶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운동에 소질있는 편이 아니라 실력이 쑥쑥 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제일 통쾌했던 순간은 역시 서브였다. 포핸드, 백핸드로 공을 제대로 맞혔을 때도 즐거웠지만, 높게 띄운 공을 상대편 코트로 순식간에 꽂아넣었.. 더보기
투명성의 지옥 '아논'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앤드류 니콜의 '아논'(Anon)을 보다. '아논'이란 '익명'(anonymous)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니콜은 '가타카'(1997)의 작가, 연출답게 비주얼은 유토피아지만 사는 모양은 디스토피아인 미래 사회를 '아논'에서 그린다. '가타카'가 유전자에 의해 계급이 사실상 결정되는 사회를 그렸다면, '아논'은 보는 모든 것이 기록돼 사생활과 익명성을 보장받기 힘든 사회를 그린다. '아논' 속 사람들은 한때 유행하려다 말았던 구글 글래스를 쓴 듯한 인터페이스 속에서 살아간다.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이름, 직업 등이 자막으로 나타나고, 노점상의 핫도그를 보면 각각의 이름과 성분이 나타난다. 이런 시각 이미지들은 모두 기록돼, 범죄 수사에 활용되거나 심.. 더보기
커다란 농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스포일러 있음.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다. 자기도취에 빠진 백만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착해지는 기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헐크'도 좋다. 사실 마크 러팔로의 헐크보다는, 에릭 바나의 헐크가 좋다. 리안의 그 기나긴 헐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좋아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엔 그 진지함이 지루했는데, 갈수록 진지함이 꼴통스럽게 변하면서 재밌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근래 나온 슈퍼히어로물 중 최고 수작이라 생각한다. '토르' 시리즈는 영화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의 캐릭터는 잘 구축됐다. 토르는 아이언맨과 다른 차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캐릭터다. 좀 얄미운 아이언맨과 달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더보기
유령을 보는 혹은 보는 척 하는 형사 '리버' 영국의 6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리버'를 보다. 영국, 경찰, 티비 시리즈라 했을 때 떠올릴법한 정서는 '우울'이다. '리버'도 다르지 않다. 6부작, 6시간에 걸친 시간동안 내내 우울하다. 주인공이 70년대 디스코 'I love to love'에 맞춰 2인무를 추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우울하다. 형사 존 리버와 파트너 스티비 스티븐슨이 함께 차를 타고 순찰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곧 스티비는 이미 죽은 사람임이 밝혀진다. 말하자면 리버는 죽은 이를 본다. '식스 센스'의 성인 버전이다. 하지만 '리버'는 '식스 센스'의 아이처럼 유령을 두려워하기보단 주로 짜증과 화를 낸다. 가끔 유령의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기도 한다. 다른 사람 눈에는 허공에 주먹질 하는 걸로 비춰지는게 문제긴 하다. .. 더보기
식물도 죽이지 말라 '세계 종교의 역사' '세계 종교의 역사'(소소의 책)를 읽다. 원제는 'A Little History of Religion'이다. '리틀 히스토리'라 한 것은 책 분량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 각 종교를 간략하게 설명한다는 뜻인 듯하다. '세계 종교의 이해'같은 타이틀의 대학 교양 시간에 교재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학교수인 역자가 이 책을 그러한 용도로 추천하고 있다. 역자니까 당연히 자신의 책이 좋다고 하겠지만, '옮긴이의 말'의 찬사는 의례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 '탁월' '두려움' '질투' '감사' 같은 어휘가 사용된다. 난 해당분야 전공자가 아니니까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찬사에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저자 리처드 할러웨이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에딘버러 주교를 역임했다고 한.. 더보기
건달과 식당주인과 그 아내와...'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장강명 작가의 추천으로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민음사)를 읽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권'이니 '명작' 맞겠지? 그런데 내용은 정말 통속적이다. 어느 고속도로변 간이 식당에 우연히 흘러들어온 건달 프랭크가 식당 주인 여자 코라와 눈이 맞아 주인 남자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한다. 둘은 노련한 변호사의 변론으로 살인혐의를 벗고 남편이 들어놓은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낸다. 하지만 프랭크와 코라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둘은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서로에게 묶어둔다. 임신한 코라가 아파 프랭크가 서둘러 차를 몰고 돌아오는 중에 교통사고가 난다. 코라는 앞 유리창 너머로 튕겨나가 죽어버리고, 프랭크는 여자의 살인 누명을 쓴 채 교수대에 오른다. 끝. 여자의 죽음은 남자가 의도.. 더보기
아이돌에 대한 몰입과 거리감 '도쿄 아이돌스' 명성이 자자하던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감독 교코 미야케)를 보다. 소재가 눈길을 끌거니와, 그 소재를 다루는 태도가 좋다. 일본 지하 아이돌과 그들의 팬덤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적절한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소재를 장악하는 동시, 그에 대한 거리를 유지한다. 저널리즘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갖기 힘든 태도다. 리오라는 지하 아이돌과 그의 팬덤이 중심이다. 팬덤은 주로 남성이다. 팬의 연령과 직업은 다양하다. 대체로 미혼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리오가 여는 소규모 콘서트에 빠짐없이 나오고, 씨디를 사고 또 사고, 악수회에 참여해 악수와 함께 1분 안팎의 대화를 한다. 리오의 인터넷 방송도 매번 시청한다. 한 팬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다 실패한 후,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아이돌을.. 더보기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 더보기
이상한 감독, 주연, 투자자, 리뷰어, '서던 리치'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서던 리치: 소멸의 땅'(원제 Annihilation)을 보다. 감독이 '엑스 마키나'의 알렉스 갈랜드라기에 영화가 이상할 줄은 알았는데, 역시 이상하다. 일단 이런 영화 만든 감독이 이상하고, 이 영화 주연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가 제일 이상하다. 찾아보니 제작비 추정치가 4000만 달러 정도 되던데, 설마 회수하겠다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 너무 멀쩡한, 그래서 심심한 영화들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땅을 칠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 아니니 알 바 아니다. 또다시 헛된 꿈을 꾸는 이상한 투자자들이 나타나길 바랄 뿐. 미국의 한 국립공원 내 등대에 이상한 빛이 떨어진다. 이후 .. 더보기
위대하지도, 굴욕적이지도 않은 삶 '스토너' '설레발은 필패'라는 옛 명언이 있지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의 첫 20페이지를 채 읽지 않았을 때, 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리라는 걸 알았다. '스토너'는 1965년 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나, 50년쯤 지난 뒤 재발견됐다. 물론 작가는 1994년 향년 72세로 죽은 뒤였다. 존 윌리엄스의 삶은 소설 속 윌리엄 스토너처럼, 영광스럽지도 그렇다고 굴욕스럽지도 않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한 문단 정도로 요약한 뒤 시작한다. 189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19세에 미주리 대학에 들어간 뒤 영문학을 전공해 그곳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1956년 사망하기 전까지 모교 강단에 섰다. 스토너는 평생 조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고, 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