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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만 들어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봤다. 이 영화가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감독 교체(드니 빌뇌브->스테파노 솔리마)보다는 에밀리 블런트의 부재가 더 큰 이유라고 꼽고 싶다. 에밀리 블런트는 전편에서 멕시코 마약 조직 소탕을 위해 투입된 FBI 요원 케이트 역을 맡았다. 케이트는 FBI로는 베테랑일지언정,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는 신참이다. 카르텔은 잔인무도하기가 세상에 이를데 없다. 이 카르텔에 비하면 '대부'의 마피아는 신사라고 느껴질 정도. 잔인무도한 조직에 맞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점잖을리 없다. 작전의 책임자인 CIA 요원 맷(조쉬 브롤린)과 '컨설턴트'라고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역시 알고보면 잔인무도한 사람들이다. 알레한드로가 조직원을 취조하기 위해 커다란 생수통을 들고 조사실로 들어오는 장면의 위압감은 압도적이다. 알레한드로가 어떤 방법으로 취조하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섬뜩하다. (그래서인지 '데이 오브 솔다도'에도 생수통 몇 통을 비치해둔 장면이 있다. 전편의 패러디로 보인다.)

케이트는 카르텔과의 전쟁의 초심자로서 작전의 관찰자 역할을 수행했다. 맷이 주도하는 불법적이고 사악한 방법에 겉으로는 반발하면서도, 카르텔을 잡기 위해선 손에 피와 똥을 묻혀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는 안다. 케이트도 소극적으로만 반발함으로써 결국 이 작전을 승인하게 된다. 케이트는 사법기관의 윤리적 모호함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에밀리 블런트가 그 역을 잘 소화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데이 오브 솔다도'엔 케이트가 없다. 그래서 윤리적인 갈등 같은 것도 없다. '데이 오브 솔다도'는 먼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현재는 죽이 착착 맞는 두 남자 맷과 알레한드로의 건조한 버디 무비에 가깝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엔 유머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장면이 없다. 미국 영화에서 드문 경우다.) 멕시코-미국 국경을 통해 극단적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밀입국해 들어오자, 미국 정부는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주를 막으려 한다. 카르텔에게 멕시코발 불법 이주는 마약 밀수보다도 이윤이 남는 일이다. 맷과 알레한드로가 이 작전에 투입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 정부의 얕은 수는 몇 차례 스텝 끝에 꼬인다. 미국 정부는 꼬리를 자르고 발을 빼려하고, 말단들은 희생돼야 한다. 알레한드로는 그 말단이다. 


손가락 한 번 튕겨서 우주의 생명체 절반을 죽인다는 타노스, 조쉬 브롤린

'데이 오브 솔다도' 예고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델 토로는 멋진 배우다. 

카르텔과의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국 정부의 비열함이란 구도는 좀 흔하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정의로우려하나 끝내 심하게 흔들리고 마는 케이트의 존재 덕에 전편에서 독특한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데이 오브 솔다도'는 좀 더 흔한 액션, 스릴러 영화가 됐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꽤 즐겼다고 해야겠다. 전편이 조성한 사막같이 건조한 분위기를 잘 계승했고, 맷과 알레한드로 캐릭터의 매력도 잘 살렸다. 몇 차례 액션 장면도 잘 찍었다. 전편에서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의 평화로운 저녁 식사 자리에 난입한 장면 같은 숨막히는 긴장감은 없지만, 액션 자체는 전편보다 호쾌한 편이다. 

전편보다 확실히 기억에 남는 건 음악. '배트맨 VS 슈퍼맨'을 보고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원더우먼 테마 음악이듯,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본 뒤에도 테마 음악이 오랫동안 귀에 맴돈다. 작곡자는 Hildur Guðnadóttir라는, '힐두르 구드나도티르'라고 읽어야할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이다. 찾아보니 아이슬란드 출신 첼리스트이자 작곡자다. 솔로 앨범을 몇 장 내놓았고, 영화 음악에도 참여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없는 것 같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의 음악은 긴박감 넘치면서도 음산하고 음울하고 신비롭다. 이런 음악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아이슬란드 사람(들)인 시규어 로스다. 그 나라에 살면 다들 이런 감성을 갖는 건가. 아무튼 앞으로 이 작곡가의 음악을 더 많은 영화에서 듣게 될 것 같다. 

구드나도티르의 음악은 이런 느낌. https://www.youtube.com/watch?v=NmZ2pAFbX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