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다. 자기도취에 빠진 백만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착해지는 기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헐크'도 좋다. 사실 마크 러팔로의 헐크보다는, 에릭 바나의 헐크가 좋다. 리안의 그 기나긴 헐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좋아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엔 그 진지함이 지루했는데, 갈수록 진지함이 꼴통스럽게 변하면서 재밌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근래 나온 슈퍼히어로물 중 최고 수작이라 생각한다. '토르' 시리즈는 영화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의 캐릭터는 잘 구축됐다. 토르는 아이언맨과 다른 차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캐릭터다. 좀 얄미운 아이언맨과 달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뒤 잔을 깨트려버리는 단순무식함이 재미있다. '스파이더맨'은 좋은 성장영화다. 역시 핵심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메리제인과의 풋사랑이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좀 더 봐야 알겠는데, 공간을 쥐락펴락하는 시각적 트릭은 뛰어나다. 그건 정말 영화적인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어벤져스' 시리즈를 좋아한 적은 없다. 지난 두 번의 어벤져스 시리즈는 반쯤은 의무적인 기분으로 봤다. 사실 뭘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러 영웅들이 나왔고, 악당이 시시했다는 것 정도. 헐크가 로키를 패대기치는 장면의 유머도 기억은 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오늘 봤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 '독과점'을 말하는 건 진부하고 어색하다. 동시기 개봉작 중 이 영화와 상영관을 나눠가질 만한 상업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0분 표를 끊었는데, 사실상 매진이었다. 



악당 타노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사실상 주인공.


난 '인피니티 워'를 커다란 농담처럼 여긴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저 이 영화의 '밖'에서는 할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시빌 워'에 나타난 히어로들의 대립구도나, 아이언맨이 미국의 군산복합 슈퍼리치를 그리는 방식이나, 헐크의 심리적 여정에 대해선 뭔가 말할 수 있다. 블랙 팬서와 흑인문화의 '쿨'과 '쉬크함'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피니티 워'는 영화 바깥으로 나가면 할 이야기가 없다. 이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주 창조 설화니, 다 모으면 손가락을 튕겨서 우주를 절멸시킬 수 있는 인피니티 스톤 같은 것을, 난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할 뜻이 없다. 일각에선 이 영화의 악당 타노스가 '이유 있는 악당'이라며 '인피니티 워'에 깊이를 부여하려 한다. 다짜고짜 '죽이겠다'고 하는 악당보다야 깊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의 자원이 부족하니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야한다는 논리는 18세기 '인구론'의 조야한 확장판에 불과하다.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피니티 스톤이라면, 생명체를 줄여 자원을 아끼기보단 자원을 늘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더 경제적이고 마음도 편할텐데. 차라리 비슷한 논리로 다수 인류를 죽이려한 '환경주의자' 발렌타인('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 타노스보다 그럴듯했다. (정말 발렌타인처럼 제정신이 아닌 IT 거물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반면 타노스의 존재나 행동 동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요즘 인기 있는 '이유 있는 악당'이 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차라리 로키처럼 그냥 천성이 비뚤어져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 있을 것 같다.

사실 '인피니티 워'는 웃긴다. 조금 진지해지려는 순간마다 농담을 배치한다. 그루트의 사춘기 유머, 드랙스의 부동자세 유머, 스타로드의 지방과 근육 유머 모두 웃긴다. 자아가 뾰족한 아이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브루스가 브루스 자신(헐크)과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토르: 라그나로크' 때부터 본격 유머를 보여준 토르도 여전히 웃긴다. 와칸다의 '스타벅스' 유머에도 피식했다.  

그러므로 나는 '인피니티 워'를 2시간 40분짜리 유머이자 팬서비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많은 히어로와 빌런을 등장시키고도 균형을 유지한 점도 높이 사야겠다. 그외엔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