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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세헤라자데, 아빠.

어쩌다 아이를 재울 때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아이는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요구한다. 지웅이와 윤우 이야기, 지웅이 이야기. (윤우는 옆 동에 사는 사촌동생인데 언젠가부터 무슨 이유에선지 이야기의 조연으로 끼어들었다. 대부분 극 초반부에 등장한 뒤에 빠진다)


전자는 일종의 판타지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하되, 판타지 요소를 살짝 섞는다. 마치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와 3/4 플랫폼으로 가면 호그와트행 열차를 탈 수 있는 것처럼. 이 판타지 세계는 시간적으로 현실 세계와 겹쳐있고, 공간적으로 현실 세계와 독립돼 있다. 예를 들어 오늘밤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웅이와 윤우가 살고 있었어요. 윤우는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고, 지웅이는 밤마실을 나가고 싶었어요. 엄마가 집을 청소하는 사이, 지웅이는 아빠와 차를 타고 마트에 갔어요. 지웅이는 마트에서 물고기도 보고, 시식 빵도 먹고, 시식 사과도 먹고, 시식 두부도 먹고, 라바 스티커도 사고, 오레오 과자도 샀어요. 그래도 지웅이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어요.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지웅이는 아빠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먹자고 졸랐어요. 아빠는 지웅이를 아이스크림 가게에 데려갔어요. 그런데 지웅이는 큰 고민에 빠졌어요. 바닐라맛도 먹고 싶고 초콜렛맛도 먹고 싶은데, 아빠는 하나만 골라야 된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아이스크림 통 사이에서 자그마한 요정이 나타났어요. 요정은 지웅이의 고민을 듣고는 말했어요. "그럼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렛이 박혀있는 쿠키 앤 크림을 먹으면 돼!" 지웅이는 아빠에게 쿠키 앤 크림을 사달라고 했어요. 아빠가 계산하러 간 사이 지웅이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꿈에 부풀었어요. 그때 요정이 다급하게 외첬어요. "지웅아, 그러나 한 가지만 명심해. 이걸 지켜야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어. 아이스크림은 한 번에 하나만 먹어야해. 더 먹겠다고 조르면 배가 아파서 다시는 나를 만날 수 없을지 몰라." 지웅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요정과 약속했어요. 아빠가 통밀콘 위에 받아들고 온 아이스크림은 참 맛있었습니다. 



이미지는 물론 본문과 관계없음. 



후자는 주로 우화, 교훈적 설화의 구조를 차용한다. 그런데 난 이쪽이 좀 더 어렵다. 예를 들어 오늘 이야기는 이랬다. 


지웅이는 아주 빨리 달리는 아이였어요. 지웅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빠르다고 생각했어요. 어느날 지웅이는 터보라는 이름의 달팽이를 만났어요. 지웅이는 터보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어요. 지웅이는 터보에게 달리기 경기를 하자고 말했어요. 터보는 자기는 느려서 지웅이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지웅이가 원한다면 경기를 하겠다고 말했어요. 출발 신호가 울리자 지웅이는 재빠르게 달려갔어요. 터보는 한참을 뒤쳐졌어요. 지웅이는 갑자기 경기가 따분해져서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기로 했어요. 아무리 오래 자도 터보가 따라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거든요. 지웅이가 그렇게 늘어지게 자는 사이, 터보는 힘을 내서 지웅이를 앞질렀어요. 잠에서 깬 지웅이는 터보가 자기보다 한참 앞서 달려가 결승선을 코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지웅이는 부리나케 달려갔어요. 지웅이, 터보, 지웅이, 터보...누가 이겼을까요. 지웅이가 가까스로 이겼습니다. 그러나 지웅이는 앞으로 자기보다 느린 이를 비웃지 않고, 스스로 잘 달린다고 자만하지도 않기로 했어요. 


앞으론 웬만하면 판타지만 해주려고 한다. 즉석에서 (비록 표절, 오마주, 패스티쉬로 범벅돼 있기는 하지만) 두 가지나 지어내기도 힘들다. 오늘밤에도 "내일부터는 '지웅이와 윤우 이야기'만 하자"고 약속했다.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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