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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훌륭한 작가는 무언가와 싸운다, <도련님의 시대>와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좋아했다. 한국의 지식인-소설가들이 "농촌 가서 계몽하자"는 소설을 쓰기도 전에, 사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어떻게 쓸 수 있었단 말인가.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나 <마음>의 모던함은 100년 전의 소설이라곤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마 나쓰메 소세키는 조선의 소설가들처럼 나라를 잃어본 적도, 지독한 가난이나 큰 전쟁을 겪은 적도 없어서, 그렇게 물에 물탄 듯 밍밍하지만 그러나 그 물결의 무늬가 섬세하게 그려진 소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짐작해 보았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가 <도련님>을 창작하는 과정을 그린 만화 <도련님의 시대>(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가와 나쓰오 글/세미콜론)를 읽고는 생각이 싹 바뀌었다. 나쓰메가 비록 지독한 전쟁, 가난을 겪은 적은 없지만, 그리고 그의 시대인 메이지 천황 시절에 일본은 승승장구했지만, 그는 이웃나라의 작가들 못지않게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벌인 싸움의 대상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적, 바로 그 자신이었다. 나쓰메는 근대와 현대의 이행기를 지나던 일본에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싸워야했다. 나쓰메가 남긴 소설을 보면 그가 싸움에서 이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겉보기엔 고요하고 알고보면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모든 훌륭한 작가는 무언가와 싸워야 한다!



1000엔 지폐 속의 나쓰메 소세키. 지금은 도안이 바뀐 것으로 안다. 


나쓰메는 2년간 런던으로 국비유학을 떠났는데, 그 동안 지독한 신경쇠약과 향수에 시달렸다. 그 병은 심지어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심약했던 나쓰메는 자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외국계 교수 때문에 괴로워했고, 맥주를 실컷 마신 뒤 주사를 부렸으며, 정치적으로 문제될 일에는 몸을 사린 채 개입하지 않으려했다. 낯이 얇은, 즉 어떤 면으로 봐도 지사적이지 않은 지식인 나쓰메는, 그러나 그렇게 여리면서 비관적인 시선으로 근대라는 폭주 기관차에 올라탄 동시대 일본인들을 관찰했다. 욱하는 성질이 있고, 끝까지 일터를 지켜내지 못하며,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도련님'은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은 야비한 거짓말쟁이들이 승리하는 곳이 될 것이다. 나쓰메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친김에 <도련님>을 구해 읽었다. <도련님의 시대>의 작가는 <도련님>처럼 슬픈 소설이 없고, 영화화될 때마다 골계미를 주조로 연출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힌다. 그러나 첫 부임지의 동료 교사들에게 제멋대로 별명을 붙이고, 학생들에게 골림을 당하고, 야비하고 비겁한 동료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결국 몰래 숨었다가 한바탕 패주고 도망치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도련님'의 이야기는 분명 우스꽝스럽다. 물론 그 도련님이 이길 수 없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도련님의 시대>의 작가처럼 슬퍼질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