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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귀가 들린 집, 파괴적인 사랑, <빌러비드>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에 인용된 김에 생각이 나서,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으나 읽지는 않았던 토니 모리슨의 소설 하나를 집어 들었다. 훅스가 인용한 작품은 아니지만, 왠지 끌린 제목은 <빌러비드>였다. <아메리칸 사이코>를 4분의 1도 안 읽고 기분이 나빠진 채 포기한 직후였다.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진 않지만, 그래도 <빌러비드>는 첫 두어 챕터만 읽고도 "역시 이래서 노벨문학상!"이란 감탄이 나오며, 또 <아메리칸 사이코>로 침침해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빌러비드>가 마냥 독자의 영혼을 평화롭게 만드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빌러비드'는 어느 여성 노예의 죽은 딸이다. 아이를 묻을 때 묘비명을 새겨야 하는데, 글자를 모두 새길 돈이 없어 '사랑하는'(빌러비드)이라고만 새기고 말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짦은 묘비명조차 묘비 새기는 석공에게 무덤 사이에서 가랑이를 벌려준 댓가로 얻어낸 것이었으니. 


'귀신 들린 집'이란 테마는 할리우드 공포영화에 많이 나오는 것이고, '원귀' 테마는 한국 전설에서도 자주 들은 것인데 <빌러비드>는 그 두 가지를 섞는다. 할리우드 영화의 귀신들도 가끔은 한이 맺혀 산 자를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 한이 그다지 절절해 보이지는 않아, 그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 <빌러비드>는 다르다. 그래서 이 소설의 한맺힌 귀신 테마는 한국 독자에게도 익숙해 보인다. 





그래도 미국에선 건국 초기부터 링컨의 해방까지 공식적으로는 100여년, 이후로도 1960년대의 흑인 민권 운동기까지 비공식적으로 100여년 더 이어진 흑인 노예, 혹은 노예와 같은 차별의 역사에서, 토니 모리슨의 소설이나 재즈나 블루스 같이 (부정적 의미 전혀 없는) 이런저런 한풀이 산물들이 등장했으니, 제대로 한을 풀고 있는 셈이랄까.  


빌러비드가 죽은 이유는 소설 중간쯤에 나온다. 끔찍하고 결정적인 스포일러라서 혹시나 이 글을 읽을 분들에겐 미리 알려드리지 않으려 한다. 다만 노예 사냥꾼에게 쫓겨 붙잡히기 직전의 여성 탈출 노예가 벌인 어떤 일 때문에 빌러비드가 죽었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사건이 실화라고 한다. 모리슨은 그 사건을 접한 뒤 소설을 구상했다고. 


앞서 훅스가 인용했다는 모리슨의 말은 '로맨틱한 사랑'이란 개념은 "인간 사고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자기파괴적인 개념 중 하나"인데, <빌러비드>에는 이성간의 로맨틱한 사랑보다는 모녀간의 사랑이 나온다. 근데 그것도 파괴적이긴 마찬가지다. 빌러비드와 그 엄마 시이드의 사랑이 바로 그러해서, 둘의 사랑은 서로를 괴물로 만든다. 그렇게 서로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모습이 기괴하고, 미국의 흑인 노예와 관련된 참혹한 이미지들이 그로테스크하다. 얼핏 기억나 찾아보니 조나단 데미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 탠디 뉴턴이 '빌러비드' 역을 한 거야 그렇다치는데, 오프라 윈프리(!)가 시이드 역을 맡은 것은 상상이 잘 안된다. 아마 많은 관객이 나처럼 생각해서 영화가 망하지 않았을까 한다. 어느 책의 좋은 독자가 된다는 것이 그 책이 영화화됐을 때 주연을 맡는다는 의미는 아닐텐데. 


읽느라 에너지가 빼앗기는 종류의 소설이긴 한데, 잠시 시간을 두고 모리슨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재즈>도 구해둔 것 같은데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파라다이스>부터 읽을 것 같다. 


포스 있으심. 토니 모리슨(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