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미지

오늘의 서부영화. <더 브레이브> vs <랭고>

<더 브레이브>는 쓸쓸하면서도 단호한 에필로그가 인상적이다. 코엔 형제가 캐릭터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능력이야 일찌감치 증명된 바고. <랭고>는 전체관람가긴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할지는 의문인 애니메이션이다.

<더 브레이브>. 소녀는 기어이 두사내를 따라 나선다.

멜로, 코미디, 공포 등의 장르에는 시간, 장소, 인물의 제약이 없는 반면, 서부영화는 19세기 중후반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백인과 북미 원주민이 주로 등장한다. 미국인들에게만 익숙한 설정이 전세계적으로 유통되는 문화 컨텐츠가 됐으니, 서부영화는 할리우드가 획득한 보편성과 자신감의 증거인 셈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초창기인 1920~30년대 등장해 50~60년대 절정기를 맞았고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변종을 경험한 후 서서히 몰락한 서부영화. 그러나 1990년대 <늑대와 춤을>, <라스트 모히칸> 등의 성공과 함께 부활의 조짐을 보인 서부영화는 여전히 할리우드 사람들의 구미를 잡아당긴다. 잘 만들어진 2편의 서부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선보인다. 코엔 형제 감독의 <더 브레이브>(24일 개봉)와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랭고>(3월 3일 개봉)다.

◇옛 사나이의 가치, <더 브레이브>=14세 소녀 매티(헤일리 스타인펠드)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친 무법자 채니(조쉬 브롤린)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매티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보안관 카그번(제프 브리지스)에게 추격을 의뢰한다. 여기에 젊은 텍사스 특수경비대원 라 뷔프(맷 데이먼)가 합류한다. 3명은 채니의 행방을 찾아 무법지대인 인디언 보호구역 안으로 향한다. 그러나 늙은데다가 술주정도 심한 카그번에게 매티는 차츰 실망한다.

<더 브레이브>. 맷 데이먼 못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영화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 28:1)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원제가 <True Grit>(진정한 용기)인 이 영화는 1968년 소설 원작이 나왔고, 이듬해 서부영화의 아이콘인 존 웨인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등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진부해 보이기까지 한 가치관에 코엔 형제 식의 비틀기가 첨가됐다. 악당은 보잘 것 없고, 보안관은 고집불통 노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다수의 악당과 홀로 대결하는 보안관은 현대 남성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옛 사나이’로 그려진다. 

<더 브레이브>, 제프 브리지스는 술취한 연기에 도가 텄나. 하긴 <크레이지 하트>에서 그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받았으니.

북미 원주민들은 1890년 ‘운디드 니 학살 사건’ 이후 보호 구역 안으로 사실상 쫓겨났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백인 남성들이 자신들의 개척 정신과 남성성을 발현할 수 있는 무대도 사라졌다. <더 브레이브>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임무를 마친 보안관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유행했던 서부극 서커스단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제 거친 남성성은 돈을 내고 구경할 수 있는 희화화의 대상이 됐다. 영화는 성인이 된 매티가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을 띤다. 이같은 구성은 다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옛 남성성에 거리를 두는 한편, 사라진 옛 가치에 대한 향수를 강조한다.

<랭고>. 랭고는 하는 짓이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우를 닮았다.


◇깨달음의 공간, <랭고>=자동차 뒤편에 실려있던 관상용 우리가 우연히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의 도로에 떨어진다. 칵테일을 마시며 장난감 물고기와 생활하던 카멜레온 랭고는 졸지에 야생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 우연히 무법자 매를 죽인 랭고는 물이 떨어져가던 마을을 구할 영웅으로 추앙된다. 그러나 마을 최고 권력자인 시장, 물을 찾아 헤매는 무법자 무리들은 랭고의 뒤를 노린다. <랭고>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주연 조니 뎁이 랭고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랭고>의 배경은 현대 미국이지만, 랭고가 떨어진 곳은 명백히 서부 개척시대의 마을을 연상케한다. 파충류, 조류가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옷차림새, 음악, 행동양식 등은 모두 서부영화에서 익숙했던 것들이다.

<랭고>의 마리아치들. 자꾸 나타나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헛소리를 해댄다.

여기서 모하비 사막은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야만의 공간이다. 고전 서부영화는 전통적으로 문명 대 야만의 이분법을 핵심 구도로 삼아왔다. 그러나 <랭고> 속 야만의 공간은 생명을 잃을만큼 위험하지만 아울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장소다.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에 젖은 도시인들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고귀함, 희생정신, 자아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신화적 공간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속 잭 스패로우 선장을 닮은 ‘허허실실’ 캐릭터 랭고는 광막한 사막에서 ‘서부의 수호신’을 만난 뒤 소명을 깨닫는다. 이 대목은 1960년대 히피 문화가 그렸던 환각 체험처럼 기묘하게 묘사됐다. 


마을에서 물은 돈 대신 은행에 맡길 정도로 귀하다. 이 귀한 물이 도로 건너편의 도시에서는 골프장에 뿌려진다. 시장은 인간들의 개발 계획을 흉내내 마을을 거대한 공사판으로 만든다. 시장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총잡이의 시대는 가고 사업가의 시대가 왔다” 랭고는 저항한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깨달음을, 물을 독점하기보다는 공유하길 원한다.


가족 관객을 노린 영화답게 <랭고>는 잊혀져가는 옛 가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처럼 표현한다. 그러나 <더 브레이브>가 액자식 구성을 통해 노린 옛 가치와의 거리두기가 현실에는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서부영화는 보수적인 장르지만, 이 보수성은 정의, 협동, 자연과의 조화 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가치 판단을  떠나 인간의 근원적 감수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