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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슈+키아로스타미=<증명서>

줄리엣 비노쉬, 혹은 쥘리에트 비노슈의 말은 좀 특이하다. 몇 차례 기자회견을 본 적이 있는데 여느 배우와 어법이 다르다. 굉장한 철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횡설수설, 동문서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전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허우샤오시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올리비에 아사야스, 미하엘 하네케, 샹탈 애커만, 크지쉬토프 키에스로스키, 그리고 장 뤽 고다르와 작업했던 배우다. 오늘 기자회견에서도 통역이 버버버버벅대는 광경이 목격됐다. 수신기를 끼지 않고 그냥 영어로 들었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리고 <증명서>가 좋다. '지그재그 3부작'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2010년이니까.






감독과 여배우의 관계는 미묘하고 중요하다. 마치 연인처럼, 둘은 싸우고 사랑하고 화해하며 인생을 닮은 영화를 만들어간다.

이란 출신의 명장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프랑스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가 함께한 신작 <증명서>를 들고 부산을 찾아 12일 기자들과 만났다. 비노슈는 <증명서>를 시작한 상황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감독님이 여러 번 테헤란에 초청했어요. 첫날 감독님 집에 가기 전부터 걱정이 컸습니다. 남녀가 단 둘이 집에 있으면 이상한 소문이 돌 수 있고, 특히 아시다시피 감독과 여배우의 관계가 더 그렇잖아요.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어요. ‘난 우정을 원한다’. 감독님이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나도 그렇다’고 말하더군요.(웃음)”

이날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눴다고 한다. 특히 키아로스타미는 장시간에 걸쳐 자신이 겪었다는 실화를 들려주었다. 비노슈가 완전히 빠져들어서 듣고 있는데, 이야기를 마친 키아로스타미는 “내 말이 믿어지느냐”고 물었다. 비노슈가 “물론”이라고 말하자, 키아로스타미는 “다 거짓말”이라고 답했다. 이때부터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오가는 <증명서>의 작업이 시작됐다.

키아로스타미는 “쥘리에트에게 말하기 시작했을 때 이야기는 미완성이었다. 쥘리에트가 관심을 보이자 살을 붙여 설명했다. 쥘리에트가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이후 시나리오를 썼다”고 설명했다.

비노슈는 이 영화로 올해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이전에도 베니스, 아카데미 등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 상복 많은 배우다.

“학교 다닐 때 상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인지 제게 상은 무척 의미가 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걸 잊어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하면 상을 받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게 됩니다. 바람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놔두는 거죠.”

비노슈의 상대역은 연기 경험이 없는 바리톤 가수 윌리엄 쉬멜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전문 배우 3명을 차례로 비노슈의 상대역으로 추천했으나 모두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왜 이렇게 나이 많은 남자만 데려오느냐”는 핀잔과 함께였다. 결국 키아로스타미는 오페라 작업을 하다 만난 쉬멜을 점찍었으나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비노슈에게 본심을 얘기하지 않았다. 리허설 직전 키아로스타미는 비노슈에게 쉬멜 캐스팅 소식을 알린 뒤 당부를 곁들였다. “당신이 배우니까 쉬멜 연기 부분을 책임져 달라.”

프랑스 여배우지만 비노슈는 허우샤오시엔, 키아로스타미 등 아시아 감독들과도 인연이 많다. 비노슈는 “새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연기를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와 최대한 가까워질 수 있을지만 생각한다. 누군가란 바로 감독이다”라고 말했다.

“단순히 영화를 찍겠다는 목적으로 배우 생활을 하지는 않아요. 그건 지루한 일입니다. 연기의 목적은 인생의 경험이죠.”(비노슈)

“전 연출하지 않습니다. 카메라 앞에 삶을 그린다고 생각하고 관찰합니다. 때로 내가 누구인지를 잊고 관찰만 하는 적도 있습니다.”(키아로스타미)

<증명서>는 키아로스타미의 세번째 해외 로케이션 작품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차기작도 한국, 일본 등을 포함한 아시아에서 촬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영화 언어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언어지만 역시 모국어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현재 이란에서 영화 만들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 영화 ‘증명서’

부부행세 하던 남녀, 진짜 부부감정이 싹트는데…


책 홍보차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방문한 작가 밀러(윌리엄 쉬멜)는 자신의 팬이자 갤러리를 운영하는 여자(쥘리에트 비노슈·오른쪽)와 만나 하루 동안의 관광에 나선다. 함께 들른 식당에서 부부로 오인받은 둘은 이후 부부 행세를 하며 다니는 놀이를 한다. 그런데 놀이가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둘의 부부 행세는 행동을 넘어 생각과 감정으로까지 번진다. 어느덧 둘은 실제 부부인양 삶의 고민과 격정, 회한을 털어놓으며 싸우고 사랑하고 이해한다.

원제는 ‘Certified copy’. 사전적으로는 ‘증명서’의 뜻도 있지만 영화의 내용을 고려하면 이 같은 번역은 충분치 않다. 오히려 ‘인증 사본’ 정도가 적당하겠다.

중년의 두 남녀는 실제 부부로 산 적이 없음에도 어느새 부부의 감정을 갖는다. 세월과 경험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지 않은 이들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가, 누군가의 아버지·스승·아내·자식·상사 등으로 규정되는 정체성은 개인의 본질에 얼마나 깊게 뿌리박고 있는가,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위작인가, 우리의 삶이란 것은 결국 연극 같은 배역 놀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조금씩 사랑으로 접근하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외양을 갖고 있으면서도 <증명서>는 이같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소박하지만 진중한 감동을 주는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증명서>의 질문을 낯설어할 수도 있겠다. 오랜 건물 위로 찬란한 햇빛이 부서지는 토스카나의 풍경도 기억에 담아둘 만하다.